너무 아름다워 괴기스러운 카파도키아

너무 아름다워 괴기스러운 카파도키아

우리가 묵은 도시는 해발 천 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요즘 이 곳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넘어 매우 덥지만 그늘에 들어서면 전혀 더위를 느끼지 못하겠다. 고도가 높은 이유도 있지만 습기가 적은 게 더 큰 이유라고 한다. 새벽에는 약간 추위가 느껴져 이불을 끌어 덮어야 했다.

▲ 외계인이 살 법한 카파도키아의 기이한 풍경

아침을 먹고 나서 곧 카파도키아 관광길에 나섰다. 이 지역은 지형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아주 유명한 곳이다. 화산으로 분출된 용암이 굳어져 생긴 바위들이 그 성분에 따라 무른 부문과 단단한 부분으로 되어 있어 오랜 세월 비와 바람과 햇볕에 풍화되고 깎여 나가 기괴한 모양의 바위 군락들이 생겨났다.

어떤 지역은 사막이 되기도 하고, 어떤 지역은 계곡이 되기도 했다. 위쪽의 단단한 바위는 그대로 남고 아래쪽의 약간 무른 바위는 깎여 나가 마치 버섯 모양으로 된 바위들이 가을 논의 벼이삭처럼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광경은 감탄을 넘어 신비의 기운까지 내뿜고 있는 듯하다.

이 세상 그 어느 뛰어난 조각가라 할지라도 이 신령스러운 기운이 깃든 모습의 작품들은 쉽게 만들어낼 수 없을 것만 같다.

우리는 먼저 데브란트 계곡의 낙타 바위란 이름이 붙은 곳에서 내려 낙타 모양으로 생긴 바위를 구경하고 그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자연이 만든 형형색색의 바위에 이름을 붙여주는 건 사람들이지만 한번 어떤 이름이 붙여지고 나면 그 바위는 사람을 끌어 모으는 힘을 갖게 된다.

하기야 좀 이상하게 생긴 바위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으랴. 그 바위들에 사람들의 기억과 염원과 상상력을 덧붙여 이름을 지어주고, 그걸 수단으로 하여  돈벌이를 하고, 또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건 실상 그 바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오로지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벌이는 한낱 자기 위안이나 자기만족의 말잔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돌들이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거기 서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따름 아니겠는가.

▲ 자연이 만들어낸 걸작 예술품, 인간이 흉내 내기 어려울 듯하다.

다음으로 간 곳은 장군의 정원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파샤 바라는 곳이다. 여기는 기기묘묘한 모습의 바위들 전시장이나 다름없다. 버섯 모양의 키가 크고 또 작은 바위들이 듬성듬성 서서 사색에 잠긴 듯 무념무상으로 서 있고, 좀 가파른 길의 언덕을 올라가면 그런 모양의 바위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걸 한눈에 볼 수 있는데, 눈 아래 전개되는 그 장대한 광경은 마치 드넓은 평야에 각종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 중 좀 큰 바위에는 무른 성질의 돌을 깎고 파내서 주거 목적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기도 했고, 규모가 큰 곳은 많은 사람이 모여 예배를 보는 교회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다.

이런 일상적으로 보기 어려운 기기괴괴한 모습의 바위들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환상적이고 괴이한 장면의 외계 배경 영화 촬영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는 열기구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게 아주 장관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아 그런 호사를 누릴 수는 없었다. 예약을 했다 해도 당일 기상 조건이 맞지 않으면 취소되기가 쉽다는데, 우리가 오기 얼마 전에 여기서 사고가 났다는 뉴스를 보고 왔기에 마치 여우가 못 따 먹는 포도를 보고 시다고 했다는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멋진 풍경을 못 본 아쉬움을 달랬다.

다음으로 우리가 구경한 곳은 데링쿠유라고 하는 지하도시다. 데링쿠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고 한다. 지하 20층 깊이까지 파내려가 건설된 도시는 현재 7층까지만 공개되고 있는데, 아마도 여기 땅과 바위의 성질이 무른 것으로 되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1층은 음식을 만드는 부엌으로 사용되었고, 각기 가축을 기르는 곳, 곡식을 저장하는 곳, 종교 용도의 시설 등으로 사용 목적에 따라 구분되어 있다 한다.

▲ 지하 20층 깊이의 데링쿠유 지하 도시 내부의 공간

여기서는 약 3개월에서 1년 가까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거주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활할 수 있는 조건과 공간이 모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하의 각 방들은 개미굴처럼 미로를 통해 연결이 되어 있고, 적의 침입을 대비해서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 곳곳에 큰 바위를 이용해서 길을 막는 시설이 되어 있었다.

또 곳곳에 함정 같은 곳이 있어서 이곳 지형을 잘 모르고 처음 오는 사람들은 거기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 안전장치는 이중삼중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 지하시설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하는데, 기원 전 로마 시대 초기 기독교 박해 시절에 크리스천들이 피난했던 곳이라는 설과 이슬람이 박해되던 시기에 무슬림들이 피난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무튼 그 입구는 아주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작은데, 그 안에는 인류의 오랜 역사와 문화, 슬픔과 한과 꿈이 서려 있는 엄청난 크기의 또 다른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점심은 산꼭대기로 올라가 거기 위치한 식당에서 먹었다. 메뉴는 항아리 케밥이다. 흔히 케밥이라고 하면 터키의 고유한 음식으로 알고들 있으나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불에 구워 먹는 것은 모두 케밥이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한다. 그래서 터키에는 약 3천 가지가 넘은 케밥이 있다 한다.

▲ 터키를 대표하는 요리, 요리사가 항아리 케밥을 개봉하고 있다.

항아리 케밥은 말 그대로 토기 항아리를 이용하여 그 안에 고기와 채소를 넣어 불에 익힌 음식이다. 주인이 직접 불로 가열하는 항아리를 들고 나와 손님에게 보여주고 불을 끈 후 망치로 항아리를 깨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음식을 우리들 접시에 담아 주었다. 요란한 준비와 퍼포먼스에 비해, 내가 음식 맛에 둔감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맛은 그리 특별할 게 없는 것 같았다.

괴뢰매 박물관이 야외에 있는 이유

점심 식사 후에 식당 안에 있는 보석 판매 가게에 들러 구경만 하고, 곧 차에 올라 괴뢰메 야외박물관을 찾았다. 대개 박물관이라고 하면 우리는 견고한 건물 안에 여러 개의 방이 있고, 매우 귀중한 유물들을 유리로 된 상자 속이나 벽 속에 가둬놓은 채 유리창을 통해 관람하는 구조를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유명한 박물관이 대부분 이런 구조로 되어 있으니 말이다. 통상 이런 구조의 박물관은 도난 방지는 물론 유물 보존을 위한 온도나 습도 등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는 이유 때문에 불편하더라도 감수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야외 박물관이라고 하면 선뜻 이해되기보다는 고개가 갸웃해지기 마련이다. 유물을 야외에 전시한다면 그것들이 실내에 있기 어렵게 크거나 옮기기 어려운 것들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냥 유적이라 해야지 굳이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차에서 내려 입장권을 사 가지고 들어가 보니 왜 그렇게 이름을 붙였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는 새로 형성된 괴레메라는 이름의 도시에서 약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야트막한 산에 수많은 괴이한 형태의 바위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화산암의 풍화에다  습도, 온도, 햇볕에 시간까지 더해져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카파도키아의 지질 특성이 잘 드러난 아름답고 뛰어난 풍광은 감탄을 넘어 경탄과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할 정도다. 어쩌면 오전에 보았던 기기묘묘한 바위들보다 더 정교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의 바위들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특히 이곳은 전체가 기독교와 연관된 유적들이라 단순하게 자연의 신비스러운 모습만 볼 수 있었던 다른 지역의 바위 군락과는 분명한 차별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을 두고 신과 인간이 힘을 합해 만든 작품이라는 말도 있다지만 그 신비한 모습의 바위들과 생명을 건 종교적 신앙심이 합쳐져 형성된 이곳의 바위 하나, 돌 하나, 바위에 뚫은 굴 하나, 나무 하나까지 어디 범상한 것이 있으랴.

▲ 옛날 사람들이 교회와 생활공간으로 사용했다는 카파도키아의 돌을 뚫은 방들

이 모두가 소중한 유물이고, 빛나는 문화이고, 유서 깊은 인류의 역사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여기 눈에 보이는 것과 발에 밟히는 것 모두가 하나같이 귀중한 인류문화유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여기는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을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러하니 야외박물관이라는 이름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 박해 시절 많은 신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엄청나게 고심을 했을 것이다. 발각이 되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수도 있는 시기에 신앙심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이곳에 올라와 바위에 굴을 뚫어 교회를 만들고 신을 경배하는 예배를 드렸다.

신앙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면서 굴속에 숨어 살던 그들은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며 지하의 그 교회들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그림을 그려 두터운 신앙심을 실천했다.

여기 숨어 살던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2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그 많은 사람들이 감시하는 사람들 눈에 띠지 않고 살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아마도 돈독한 신앙심이 아니라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독교 박해가 끝나고 정식 종교로 공인된 이후에 지하에 숨어 살던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나와 지하 교회는 더 이상 그 기능이 필요 없게 되었으나 여전히 집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그 공간에 거주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바위에 뚫었던 굴이 무너지는 사고가 속출하자 정부에서는 여기 살던 사람들을 다 내보내 지금은 비어 있다.

그 중에 튼튼한 몇 곳은 호텔이나 음식점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기도 하고, 미술 전시회나 사진 전시회 같은 것이 열리기도 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굴속의 공간에서 그림과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서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전성기 때 수백 개가 넘었다는 교회는 현재 약 30개만 개방되어 관람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 중 중세 시대 미술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벽화가 있는 성당이나 프레스코 그림이 있는 교회 등이 별도의 관람료를 받고 공개되고 있었다.

건너편에 보이는 바위에 뚫린 수많은 작은 바위굴은 비둘기들이 점령하여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어 있고,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던 굴은 아주 높은 곳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는 이처럼 특이한 지형 때문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낯선 모습이어서 스타워즈 등의 환상적인 외계 배경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바위 덩어리로 된 산이라 큰 나무가 자랄 수 없고, 또 인공이 아니면 풀도 자랄 수 없는 토양이라 관람 도중 내려쬐는 강렬한 햇볕을 피할 그늘이 없어서 불편했는데, 당시 여기 살았던 사람들의 고통에 비하면 그건 엄살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현대문명의 편리한 생활이 몸에 밴 신체는 그 리듬이 깨지면서 문화유산이고 뭐고 다 귀찮고 오직 시원한 음료수와 그늘만을 갈망하게 했다. 이게 간사한 인간의 한계인가.    

콘야 대평원과 실크 로드의 자취

다시 버스를 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니 땡볕 아래 야외박물관을 관람하던 피로와 짜증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한결 누그러진 마음으로 셀축튀르크 수도였던 콘야로 이동하는 길에 올랐다.

콘야는 주변에 위치한  8개 도시 중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이고, 또 이슬람 색채가 아주 강한 도시다. 현재의 터키는 공화국 설립 이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지만 아직도 이슬람 문화의 색채가 남아 있는 편인데, 이곳 콘야는 그 중에서도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도시라고 한다.

이슬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게 여성들이 착용하는 몸을 가리는 천인데,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성차별 문제로 이를 금하여 종종 종교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히잡, 차도르, 니카트, 부르카라 지칭되는 그것들은 신체 부위를 얼마나 가리느냐의 차이를 말해 준다.

▲ 끝없이 이어지는 대평원에 해바라기와 감자 등 작물들이 가득 차 있다.

머리카락이 안 보이게 가리는 것에서부터 얼굴만 가리는 것, 눈만 보이게 가리는 것, 아예 눈까지 보이지 않게 가리는 것까지 정도의 차이가 있다. 당연히 그들도 집안에서는 이를 벗고 생활하며 외출할 때만 착용하는데, 이것은 여성들이 가족 이외의 남자들에게 신체의 일부라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계율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적 개방 추세에 따라 상당수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를 점차 완화해 나가는 중인데, 유독 콘야 같은 보수적 도시에서는 아직도 이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 하니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사정이 많이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콘야에서는 부르카를 착용한 여성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한다.

또한 콘야에서는 이슬람 교리에 따라 절대로 술을 마실 수 없는데, 이 때문에 일찍이 이 지방에서는 18세기에 유럽에 전해진 커피가 술 대신 유행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즐긴다고 한다.

이들이 마시는 커피는 우리가 마시는 것과는 좀 다른데, 커피 알맹이를 볶고 갈아내는 것은 같지만 이를 뜨거운 물로 우려내 마시는 게 아니라 커피 가루에 직접 물을 부어 그냥 마신다고 한다. 이를 터키 커피라고 하는데, 휴게소에서 한 잔을 사서 마셔 보니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내 구미에는 전혀 맞지를 않았다.

콘야에서 카이세리에 이르는 길은 현재 이 나라의 대표적인 산업도로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도로가 4차선으로 아주 잘 만들어져 있다. 대평원답게 도로 주변은 눈길 가는 데까지 아무 거칠 것 없는 지평선이 가물가물하게 펼쳐져 있다.

▲ 중국에서 출발한 실크로드의 종착지에 가까운 이곳에도 그들을 위한 숙소가 약 40킬로마다 있었다고 한다. 이 캐라번 샤이에서 숙식도 하고 물건도 거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 평원에는 각종 작물들이 재배되고 있다. 이 농장에서 주로 재배되는 작물은 감자, 해바라기 같은 게 대표적이라고 하는데, 그 작물들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일은 대개 품삯을 받고 일하는 집시 족들이 담당하고 있다 한다.

집시들은 이곳저곳 일할 곳을 찾아다니며 이동을 많이 하며 사는데, 그러다 보니 견고한 집을 짓고 살기보다는 임시로 거주할 수 있는 천막 같은 걸 치고 사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차 안에서 내다보는 시야 안에도 그런 천막이 곳곳에 보였다.

이 고속 산업도로는 예전 실크로드의 자취를 따라 건설되었다고 한다. 중국 서부에서 그곳의 특산품을 싣고 출발한 상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거대한 산맥과 광막한 사막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유럽의 관문인 이곳까지 와서 가지고 온 상품을 팔고 여기 상품과 물자를 구입하여 돌아갔다고 하니 그 여정이 얼마나 길고 고단하였으랴.

물론 중간 기착지에서 물건을 매매하거나 교환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겠지만, 이곳까지 오려면 당연히 더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은 1차적으로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한 목적이었겠으나 결과적으로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와 문명을 서로 교환하여 상호간에 질적인 발전과 향상을 가져오게 되었으니 그들의 노고와 공헌은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산업도로를 가다 보면 여러 곳에 그 실크로드의 자취가 남아 있다. 낙타와 말을 이용한 상인들은 낮 동안에는 걷고 밤에는 자고 쉬어야 했을 것인데, 현재 거리로 약 30킬로 내지 40킬로미터 되는 곳마다 그들을 위한 숙소를 지어 놓고 운영했다고 한다.

그 숙소용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는 곳이 있다. 그 숙소를 캐러번 샤이라고 하는데, 대개는 고속도로 휴게소와 겹쳐 있어서 관련 기념물이나 안내문 같은 게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파묵칼레보다 헤이라 폴리스를 보아야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일찍 출발하여 대니즐리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이 나라는 땅이 넓기 때문에 터키 여행은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상당히 많다. 중국 땅이 넓다고 하지만 한때 제국 시절 이 나라는 그에 못지않게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의 3개 대륙에 걸쳐 어마어마한 면적의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넓은 땅을 대부분 다 뺏기고 아시아와 유럽 대륙의 일부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나라지만 이는 상대적일 뿐, 여전히 광활한 그 국토를 오가려면 한두 시간 거리의 항공기가 필요할 정도로 땅이 넓다.

▲ 사라진 고대 휴양 도시 히에라폴리스의 발굴된 유적

따라서 버스로 유명 관광지를 따라 이동하자면 보통 대여섯 시간에서 열 시간 가까이 차를 타야 한다. 당연히 나이가 든 사람들은 그 시간이 힘들기 마련이다. 이 때문일까. 이곳 가이드들은 그런 고객을 위해 필수적으로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특색을 걸쭉한 입담으로 풀어놓을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물론 다수의 고객이 피로에 지쳐서 졸음에 빠져 듣지 않게 되면 그 역시 푹 잠들어도 상관없지만 그 전까지는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종횡무진의 지식을 동원하여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계속 설명을 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가이드에 비해 상당히 힘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에게 들은 이야기들이 과연 얼마나 정확한 지식인지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그 동안 잘 알지 못했던 이 나라에 대해 많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가 달리고 있는 콘야의 서부 지역은 이슬람 색채가 강한 콘야와는 달리 기독교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기독교 관련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어 성지 순례하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고,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도 오랜 전통에 따라 기독교적 관습에 익숙하다고 한다.

▲ 파묵칼레 온천수를 즐기고 있는 관광객들

우리는 술탄산이라는 만년설이 쌓인 산 아래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산의 눈이 녹아 흘러내린 물이 고여 생긴 호수가 보였고, 따라서 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각종 농업이 발달했는데, 특히 체리를 재배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휴게소에서 팔고 있는 과일 중에 체리도 있어서 한 줌 사서 먹어보니 달착지근하고 감칠맛이 있었다. 이 휴게소에서 본 것 중 특이한 것은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 보았던 음유 풍자시인 나스레딘 호자의 동상이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봉이 김선달 비슷한 사람으로 풍자와 해학의 우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전설적 인물인데, 당나귀를 거꾸로 탄 모습의 동상으로 유명하다.

지나온 길을 보기 위해 당나귀(말)를 거꾸로 탄 것이라는데, 번득이는 지혜를 담은 우화들은 아마도 오랜 세월을 거치며 민중들의 삶을 응축시킨 적층문학적 성격이 강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즈베키스탄과 이 나라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동일한 인물이 두 나라에서 똑같이 전승 내지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돌궐족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아니면 비교문학자들이 말하는 다원발생설 때문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차창 밖으로 계속 바뀌는 풍경에 대해 가이드는 몇 가지 설명을 했다. 그 중 흥미로웠던 것은 이곳이 질 좋은 대리석 산지로 유명하다는 것과 그 대리석 채취 때 주로 버드나무를 이용해 돌을 쪼갠다는 설명과  터키 중부에 아피온(Afyon)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것이 우리말 아편의 어원이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였는데, 제국주의의 횡포로 아편이 주요 교역 품목이 되어 이 나라에서도 앵속 재배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수 천 년 전부터 동양에서 약으로 활용되었던 기록으로 보면 그게 우리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연의 일치로 비슷한 발음을 발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게 훨씬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한참 졸다가 소다 호수란 말에 퍼뜩 잠에서 깨어 밖을 내다보니 드넓은 호수가 보였다. 이 호수는 주변 지질의 특이한 성분 때문에 소다 성분의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걸 채취하여 모아 놓은 하얀 가루 무더기가 호수 가장자리에 많이 널려 있었다.

▲ 히에라폴리스는 약 10만 명이 살았던 휴양, 치료 도시였다.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이것을 재료로 하여 비누나 화장품 같은 걸 만든다고 하는데, 그런 제품을 생산하는 대규모의 공장이 여러 개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이 나라는 자연의 혜택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축복의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식당에 들러 양고기 꼬치구이로 주린 배를 채우고, 졸며 쉬며 차에 흔들리다 보니 오후 늦게 파묵칼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파묵칼레는 이 나라 말로 목화의 성이라는 뜻인데, 여기는 오래 전부터 목화의 주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먼저 면제품이 전시판매되고 있는 곳에 들러 구경을 하고, 곧 하얀 색으로 뒤덮인 언덕을 따라 올라갔다. 흔히 파묵칼레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곳의 주인은 고대 도시 헤이라폴리스라고 해야 옳다.

헤이라폴리스라는 이름의 도시는 시리아를 비롯한 다른 곳에도 있지만 여기가 규모도 가장 크고 많이 알려져 있다. 헤이라폴리스는 기원전 2세기에 다른 이름으로 시작되어 그 후 로마 제국 시대를 거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신성한 도시라는 뜻의 헤이라폴리스라는 이름도 그 당시에 생겼다. 왕래에 편리한 바다 근처에 건설된 다른 도시와 달리 교통이 불편했던 내륙인 여기에 그렇게 이른 시기에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었던 이유는 단 하나, 효능이 아주 뛰어난 질 좋은 온천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병의 치유와 휴양을 위해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점차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곳을 점령한 로마는 귀족들의 휴양과 질병의 치유를 위해 계획적으로 도시를 확장하고 여러 시설들을 추가로 건설했다.

그리하여 인구 10만이 넘는 대규모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많은 건물과 도로, 시설 등이 추가되어 큰 도시로 발전했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개발하기도 하지만 때로 자연은 인간을 잔인하게 파멸시키기도 한다. 14세기 중엽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이 거대한 도시는 한 순간에 폐허가 되어 버렸다.

약 2만 명을 수용될 수 있었던 원형극장(대개 로마의 고대 도시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을 갖추고 있어서 보통 원형극장의 규모로 그 도시 전체 인구를 추산한다.

이 도시 추산 인구 10만도 여기서 나온 숫자다.)과 약 천 수백 개의 관이 확인된 대규모 공동묘지, 그 밖에 병원, 목욕탕, 도서관, 학교 등등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온갖 시설들은 물론 그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이 도시를 죽음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에서 사라진 이 도시가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근세에 접어들어 발굴이 시작되면서다. 현재도 이 도시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작업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현재 남북 축 도로를 중심으로 한 일부만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전체를 다 조사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 없다. 한편에서는 복원 작업도 이뤄지고 있는데, 현재 관람객이 볼 수 있는 원형 극장의 상당 부문은 당시 모습과 색깔로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넓은 면적에 유물과 유적이 여기저기 산재한 이 도시를 잘 보려 하지 않는다. 긴 거리를 걸어 다니려면 다리도 아프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오래된 돌들이 다 그게 그거 같기 때문이다. 무너지고, 쓰러지고, 어디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굴러다니는 돌덩이들은 마치 쓸모없어 버려진 밭둔덕의 돌무더기 같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이 그저 한 번 쓱 훑어보고 사진이나 몇 장 찍고는 곧 바로 옆의 석회석 녹은 물로 하얗게 변한 바위 웅덩이 쪽으로 몰려든다. 땅에서 용출되는 뜨거운 온천수가 흘러 석회석 성질의 돌을 만나면 그 돌을 녹여 흰 웅덩이를 만든다.

그 웅덩이에서 넘쳐흐른 물이 언덕에서 흘러 떨어지며 녹인 석회석을 아주 조금씩 축적하여 오랜 세월이 흐르게 되면 흰 커튼 같은 모습이 형성된다. 그게 겹치고 겹쳐 먼 데서 보면 언덕 전체가 마치 흰 목화를 많이 쌓아 놓은 성처럼 보여서 파묵칼레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물과 석회석과 시간이 만나 기묘한 모습의 종유석이나 석순이 되는 건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석회석 녹은 흰 언덕을 보려고 굳이 이 먼 데까지 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파묵칼레보다는 헤이라폴리스를 보아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 일행은 여기를 찾은 많은 관광객이 하는 것처럼 흰 웅덩이 속에 고인 파르스름한 색깔의 물이 신비하게 보이는 곳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발을 담갔다. 따뜻한 물이 주는 감촉이 매끄러워 기분을 좋게 했다.

용감한 서양 아가씨들은 비키니 차림으로 들어와 몸매를 과시하기도 하고, 언어와 피부색이 다른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국경도 민족도 차이 없이 바글바글 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 허리가 굽은 노인에서부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까지 부모 품에 안겨 이 작은 세계 한 가족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 이 사라진 죽음의 도시는 지금도 발굴과 복원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늦게 들어온 탓인지 더 구경하고 싶은 것도 많고 따스한 물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도 싶은데 폐장 시각이 되었다고 관리 직원들이 사람들을 몰아낸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사람의 물결을 피해 겨우 우리 차를 찾아 타고 얼마 안 되는 곳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

여기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라 3층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가 없다 한다. 우리가 묵은 호텔도 3층의 작은 규모로 빌라 정도였다. 오래 가뭄에 파묵칼레의 물이 줄어 흔히 보던 사진과 달리 매우 빈약했던 터였는데, 호텔로 가는 길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이 비가 신기한 일이라며 좋은 조짐이 느껴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모두 했다.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