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과 기독교 유적의 보물 창고

로마 제국과 기독교 유적의 보물 창고

평소보다 이른 시각인 5시 반에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7시 반에 호텔을 출발하여 약 3시간이 소요되는 에베소(에페수스)로 향하였다. 에베소는 셀축튀르크의 수도였던 고대 도시로 예루살렘, 안디옥과 더불어 초기 기독교 3개 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 기독교 성지 중의 하나인 에베소 유적지

원래는 수상 교통이 편리한 해변에 위치하고 있었던 도시였으나 퇴적물이 점점 쌓여 육지가 바다를 메워가면서 현재는 바다로부터 수 킬로가 떨어진 안쪽에 있다.

이 도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그리스 인들이 처음 건설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기원전 6세기에 세계 7대불가사의의 하나로 알려진 아르테미스 신전이 이 도시에 건립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로마 제국이 여기를 점령하고 통치하면서 이 도시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후 주변 국가들의 정치권 흥망에 따라 이 도시의 지배자가 바뀌는 등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지정학적 위치상 활발한 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매우 부유한 도시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 풍부한 재력으로 인해 이 도시에는 로마의 뛰어난 건축술로 화려하고 정교하며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이 건설되었다.

현재 터키 안에 있는 약 2천 여 개의 로마 유적 중 여기가 가장 풍부하면서도 원형을 잘 유지한 유물이 제일 많이 남아 있는 도시라고 한다.  

▲ 이 도시는 바다에 인접한 부강한 도시였는데 현재는 바다가 메워져 내륙이 되었다.

로마는 대제국답게 다른 곳의 유적지를 허물어 그 자재를 옮겨다가 여기에 아름답고 멋진 건물을 많이 지었다. 그들이 숭배하던 여러 신전은 물론 병원과 학교, 아름다운 도서관, 음악당, 회의장, 대형 원형 극장, 경기장, 아고라, 의회 건물 등 여러 시설과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인구 20만에서 30만이 넘는 이 대도시는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룬 완벽에 가까운 도시였다.

19세기말부터 현재까지도 계속 발굴과 함께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데 상하수도 시설이나 목욕탕, 화장실의 구조를 보면 오늘날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어 신비롭기도 하다.

그렇게 영화를 누리던 이 도시는 어느 순간 큰 지진으로 무너져 땅속으로 사라지고 마는데, 오랜 세월 망각에 묻혀 있다가 19세기 말에 철도 부설 공사를 하던 영국 사람들에 의해 일부 유적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다지와 다름없는 이 도시의 유적을 마구 발굴하여 자국으로 옮겨 갔고, 나중에 발굴에 합류한 오스트리아 사람들도 발굴한 유물들을 자기 나라로 무단 반출하였다.

그 유물들이 현재 오스트리아 빈에 에베소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보관 전시되고 있다. 당시 터키 국왕의 기증 형식으로 반출했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횡포임에 틀림없다.

▲ 에베소의 규모를 짐작케 해 주는 원형 극장 겸 경기장, 약 2만 7천 명을 수용한다고.

에베소는 현재 두 개의 출입구로 드나들 수 있는데, 남쪽에서 들어가는 것이 경사진 곳으로 내려가며 유적을 볼 수 있어 편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음악당 건물이었던 여러 개의 기둥과 좌석이 남아 있는 유적을 볼 수 있고, 그 아래쪽으로 스포츠 용품으로 유명한 나이키의 상표가 유래한 니케의 여신상 조각도 만날 수 있다. 거기서 죽 내려오며 파르테논, 아데미 등의 신전의 잔존 기둥, 서민과 귀족의 주거 지역 흔적, 목욕탕과 화장실 등을 볼 수 있고 한참 더 내려오면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셀수스 도서관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이 도서관은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셀수스 총독이었던 아버지를 위해 그 아들이 135년에 아버지 무덤 위에 건립했다고 하는데, 1층과 2층에 이오니아식과 코린트식 건축 양식이 각각 적용되어 웅장함과 화려함과 섬세함이 두드러지며, 기둥 네 개에는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뜻하는 여성상을 조각하여 놓았다는데 그 진품은 물론 현장에서는 볼 수가 없다.

▲ 아들의 효심으로 건립된 아름다운 예술품 셀수스 도서관

이 도서관에는 약 1만 2천여 권의 장서가 소장되었던 걸로 알려져 있는데, 종이가 없고 양피지를 사용했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보면 요즘의 장서수와는 평면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니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으로 경사진 관람 로는 전체가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 대리석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에 닳기도 했지만 워낙 질 좋은 것이라 지금도 뜨거운 햇볕이 내려쬐면 그 반사광이 눈을 아프게 할 정도다.

그래서 여기는 태양이 두 개라는 말이 있다. 하나는 하늘에 있고, 또 하나는 대리석에 반사되는 태양이다. 간혹 노약자나 어린이는 이 강렬한 햇볕 때문에 일사병으로 쓰러지기도 한다니 유물 구경도 좋긴 하지만 조심할 일이다.  

도서관에서 입구 쪽으로 나오다 보면 길가에 묘한 유적이 하나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대리석 한 장 위에 맨발 발자국 하나와 긴 머리의 여성 모습, 구멍 한 개가 뚫려 있는 모습인데 사람들은 이게 유곽을 광고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광고라는 이 해석은 현대인들의 상상력을 더한 창조적 가설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여성을 위안이나 스트레스 해소의 성적 도구로 인식하는 고약한 사고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나 보다.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원형 극장이 나타난다. 약 2만 7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이 대형 극장은 연극 공연은 물론 음악 연주나 운동 경기 등 다용도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당시의 그 음향 시설이 잘 통용될 정도라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현명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갈만하다. 실제 안에 들어가 위를 올려다보니 까마득한 높이다.

▲ 에베소는 초기 기독교 3대 유적지 중의 하나인데, 아름다운 로마제국 건축물이 많다.

권력자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무대 가까운 곳에서 관람을 했을 것이고, 저 높은 곳에는 힘없는 서민들이 올라가 아스라이 보이고 희미하게 들리는 무대를 아쉽게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원형 극장에서 여러 개의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당시의 거리 모습이 수백 미터에 걸쳐 시원하게 뻗어 있는 걸 만날 수 있다. 지금은 발굴된 유적의 큰 돌이 길옆으로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얼마나 화려하고 번화했을 것인가. 이 길로 죽 나가면 바다의 항구와 맞닿아 있다고 한다.

그 도로를 지나 약간 올라가면 큰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 곳이 나타난다. 여기가 북쪽 출입구다. 넓은 주차장과 함께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이 잘 되어 있고, 땡볕 아래로 걸어오며 지친 다리를 편안히 쉴 수도 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 자칫하면 일행을 놓칠 수도 있어서 화장실 다녀오는 것도 만날 장소를 충분히 익혀 놓고 가야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곧 이동하여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 붉은 색의 셀축 성으로 갔다. 군사용 방어 시설인 이 성 위에는 붉은 색의 대형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이 성안에 수 만 명이 거주하면서 외적을 대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고, 우리가 보려고 하는 건 그 성이 아니라 바로 그 성 아래 위치한 사도 요한의 기념 교회 유적이다.

▲ 도서관 길 근처에 있는 유곽 광고라는데, 해석하기 나름 아닐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도시 이름 에베소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 친숙하다. 바로 성경의 <에베소서> 때문인데, 이 서신은 원래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후일 초기 기독교 형성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바울(천주교에서는 바오르)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이 2차 선교 여행 중 이 에베소에 건립한 교회(초창기 7대 교회의 하나임)에 보낸 편지 형식의 글을 썼다. 그 글에서 그는 교회의 역할과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에베소가 지정학적 위치상 이교도가 많고 교회 안에 이질적인 신도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바울 못지않게 에베소에는 또 한 명의 중요한 기독교 인물이 있는데, 그는 바로 사도 요한이다. 그는 예수 사후 그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이 도시로 와서 살았는데 그곳에 지금도 마리아 기념 교회가 있다.

당시 권력자들은 그를 죽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끓는 기름 가마 안에서도 죽지 않는 등 기적을 행하여 결국 유배를 가게 되고, 거기서 요한 계시록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박해를 하던 왕이 죽은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 무덤으로 알려진 곳에 교회를 지었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우리는 성 아래에 있는 터를 찾아 잠시 묵상을 하며 파란만장했던 그 생애를 되새겼다. 

▲ 교회가 이슬람 사원으로 바뀔 때 덧칠 되었던 성화가 최근 다시 옛 모습을 찾고 있다.

이렇게 에베소 관람을 마치고 차로 이동하여 쉬린제 마을을 방문했다. 이곳은 그리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곳으로 마을 전체가 이 나라와는 달리 그리스풍으로 짓고 꾸며져 매우 이색적이고 이국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답게 포도 농장을 만들어 거기서 생산된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파는데 그게 아주 유명하다고 한다. 관광객에게 시음을 해 보라며 주는데,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에겐 그냥 사치일 뿐이다. 술 좋아하시는 분들은 몇 병씩 선물용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간식을 먹고 사진을 찍으며 쉬다가 시간에 맞추어 이즈미르 공항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우리를 태우고 다녔던 버스 기사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몇 가지 수속을 거쳐 국내선 비행기에 탑승했다.

약 한 시간의 비행 끝에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했다. 하루 종일 강행군에 몸이 파김치가 되어 오랜만에 한식으로 제공되는 저녁을 서둘러 먹고, 호텔로 들어와 간단한 정리 후에 곧 잠에 빠졌다.

강성했던 제국은 왜 몰락했을까

쾌적한 방 덕분에 오랜만에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 호텔에서 제공하는 간단한 조식을 마쳤다. 메뉴는 여행 중 다른 나라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빵과 샐러드, 햄, 시리얼, 절인 반찬 등 공통된 것들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대개의 음식에 짠 맛이 강하다는 점이다.

▲ 블루모스크 외부 모습이다.

과거 소금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음식에 소금을 듬뿍 쳐서 대접했던 전통이 남아 음식이 짜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긴 했지만 아마도 그건 이곳 기후와 생존 환경의 탓이 더 클 거라고 생각된다. 세계 어느 곳 사람이나 자신이 나고 자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최적의 조건에 맞춰 진화하고 발전하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호텔을 나서 처음 찾아간 곳은 돌마바흐체 궁전이다. 이곳 말로 감싸 안은 정원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오스만 제국 31대 술탄인 압둘메지드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하여 건설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바다를 바로 문 앞에 둔 천혜의 입지 조건에다 최고의 아름다운 궁전을 지어 술탄의 위엄을 뽐내려던 의지가 더해져 더 말 수 없이 화려하고 웅장한 궁전이 탄생했다.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나폴레옹 3세와 동문수학을 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본 궁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귀국 후 술탄 자리에 올라 원래 목조 건물이 있었으나 불에 타 버린 자리에 1843년 이 궁전을 착공했다.

유럽의 대리석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그곳의 특산 건축 자재를 들여와 국내외 최고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10년 동안의 공사로 이 석조 건물을 완성하고, 그 후 3년 동안 내부 장식과 조경 공사를 하여 13년만인 1856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완공 기념으로 프랑스에서는 그랜드 피아노를, 독일에서는 파이프 오르간을, 영국에서는 700개의 양초를 켜야 하는 샹들리에를 선물했다고 한다.

그 후 오스만 제국 마지막 술탄 6명이 이 궁전을 사용했으며,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성립한 후 초대 대통령이었던 케말 파샤도 이 궁전을 집무실로 사용했다.

▲ 블루모스크의 내부 모습이다. 모스크 안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대통령의 집무를 위해 원래 없던 엘리베이터와 전화가 가설되었다고 하며, 그가 1938년 영면에 들 때까지 관저로 사용했는데, 그를 기리기 위해 지금도 이 궁전 안의 모든 시게는 그의 사망 시각인 9시 5분에 맞춰져 있다.  이렇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궁전을 짓는 데는 당연히 엄청난 재정이 필요했다.

내부 장식을 위해 금 14톤과 은 40톤이 사용되었으며 선물 받은 것 외에 벽에 걸어 놓은 유명 화가의 그림, 고가의 중국 도자기, 최고 품질의 각종 생활 용품 등을 수입하는 데 막대한 금액이 들어갔을 것이고, 그 재정을 기울어가는 제국의 국고로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독일로부터 80만 마르크의 빚을 지게 된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국가 재정이 파탄이 나서 외국에서 돈을 빌려다가 메우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그 부채가 결국은 이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13세기 경 한적한 지역에서 작은 규모로 오스만이 세운 이 나라는 그 후 급변하는 정세 변화 속에 유연히 대처하면서 점점 세력을 키워 마침내 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 나라가 세계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145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그 제국을 멸망시키면서라고 할 수 있다.

세력이 가장 강대했던 시절 이 제국의 영토는 서아시아와 유럽의 거의 전역,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에 이르는 3대 대륙에 걸쳐 있었고, 그 영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지배자로, 또 결정자로 그 막강한 권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또 휘둘렀다.

하지만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던가. 그렇게 막강했던 제국도 지도자의 무절제한 사치와 무능에 어쩔 수 없이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결정타는 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의 주역인 독일은 이 무모한 전쟁으로 주변 국가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치게 되는데 궁전을 짓기 위해 독일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렸던 이 나라는 그 돈을 갚지 못하게 되자 독일의 강요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 사원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이 기다려야 한다.

독일의 패전으로 끝난 전쟁 후에 국제사회가 그 책임을 따지며 추궁하게 되자 독일 편에 섰던 이 나라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결국 국제사회의 요구로 유럽과 서아시아의 대부분의 영토를 포기해야 했고, 동시에 소수 민족 독립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해 나가면서 영토는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끝내는 현재의 영토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자 그를 지키기 위한 거센 독립 투쟁이 시작되게 되는데, 이를 이끌고 싸운 주인공이 바로 터키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케말 파샤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돌마바흐체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을 장식한 화려하지만 슬픈 역사의 현장이고, 동시에 현재의 이 나라를 있게 한 독립의 영웅이 최후를 맞이한 비극의 장소이면서 또한 인류의 미래를 지켜 줄 희망의 성소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지금은 많은 관광객의 구경거리로 전락했지만 이곳은 이 나라 사람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 없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생생한 교육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 궁전은 개별 관람은 허용되지 않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른 단체 관람만 가능한데, 왕의 공간, 여자들만의 공간인 하렘, 의식과 접견을 거행하던 홀 등 세 영역으로 나뉜 공간 중에 입장권 가격에 따라 출입이 제한되는 곳도 있다.

안에 들어가면 당시 사용하던 화려한 생활 용품은 물론 역사를 재현한 유명 화가의 그림이나 초상화 등도 감상할 수 있다. 건물 밖에 조성된 정원이나 화단도 매우 아름답고, 잘 가꿔진 잔디밭이나 이색적인 나무와 꽃도 예쁜 게 많아 눈이 호강을 한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바다 풍경 또한 절경이다.

건물 외부의 섬세한 조각이며 아름다운 풍광을 제대로 즐기려면 여기서 며칠을 보내도 부족할 것 같다. 잠시 왔다 가야 하는 나그네의 처지로서는 아쉽지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궁전을 나와 점심을 먹기 전에 잠시 둘러본 탁심 광장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독립기념탑이 덩그러니 서 있었는데 작열하는 태양을 피할 수 없어 별 감흥이 없었다.

탁심 거리는 우리나라의 명동과 비슷한 번화가로 젊은이들의 거리라고 한다는데, 나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눈도 피곤하고 다리도 피곤하여 돌아다니며 구경할 마음이 별로 없었다. 역시 구경도 젊어서 해야 하는가 보다.

▲ 교회를 능가하는 건물을 지으려는 술탄의 욕망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한다.

점심을 먹고 유적이 많고 길이 좁아 큰 차가 못 다니는 관계로 버스를 타지 못하고 도보로 몇 군데를 들러보았다. 먼저 간 곳은 히포드롬 광장이다. 여기는 비잔틴 제국 시대 전차 경기가 열렸던 경기장이었다고 하는데, 오스만이 점령한 이후 경기장을 해체하고 광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광장에는 독일에서 기증했다는 ‘독일의 샘’이라고 하는 분수대와 이집트의 카르나크 신전에서 반출해 온 오벨리스크, 그리고 점령지의 무기를 모아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기원하며 만들어 세웠다는 청동 뱀 모양의 조각상이 유명하다. 그 중에 오벨리스크는 약 30미터 높이의 원형을 그대로 가져오기 힘들어 20미터 정도만 잘라서 가지고 왔다 한다.

그곳에 갔을 때 그 신전에 있던 네 개의 오벨리스크가 하나는 로마 광장, 또 하나는 워싱턴 광장으로 반출되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30미터 높이의 기둥으로 돌을 가느다랗게 자르고 다듬는 것은 물론 거기에 빼곡하게 상형문자로 기록한 내용들이 이집트 민족에게는 신앙 이상의 성스러운 의미가 있었겠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기에 그 꼭대기에 시계나 십자가를 얹는 받침대로 사용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 당사자들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깊은 신앙심의 증거물일 텐데, 아무 상관없는 다른 민족들은 그것을 함부로 잘라내고 운반하여 세워놓고 단순한 구경거리로 삼고 있으니 이걸 문명이라고 해야 하나, 야만이라고 해야 하나.

▲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에서 반출해 온 오벨리스크가 히포드롬 광장에 서 있다.

그 다음에 본 것은 광장 바로 옆에 위치한 블루모스크다. 17세기에  술탄 아흐메트에 의해 건설된 이 사원은 내부가 약 2만 개의 푸른색 타일로 꾸며져 있어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큰 돔 한 개와 작은 돔 4개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스테인드 그라스와 수백 개의 푸른 유리창으로 장식되어 있어 전 세계 이슬람 사원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손꼽히고  있다.

이 사원에는 특이하게 다른 모스크와 달리 6개의 미나레트가 서 있는데, 대체로 개인이 세운 사원은 하나나 두 개, 지방 지도자가 세운 사원은 세 개, 왕이 세운 사원에는 4개의 미나레트를 세우는 일반적인 관례를 무시하고 6개가 세워진 데는 두 개의 설이 있다.

하나는 바로 건너편에 있는 아야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의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서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사 당시 왕이 무리하게 사원을 금으로 장식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공사 담당자가 경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여섯(알트)’과 ‘금(알튼)’이 발음이 비슷한 걸 이용하여 6개를 만들어 놓고 나중에 추궁을 당하게 되자 잘못 들었다고 변명했다는 얘기다.

실제로는 앞의 설이 더 유력하겠지만 뒤의 설명은 인간적이라서 훨씬 마음이 간다. 이 사원은 지금도 예배용으로 사용 중이기 때문에 관람객은 신발을 벗고 조용히 들어가 관람해야 한다. 

▲ 돌마비흐체 궁전의 아름다운 외관이다.

다음으로 바로 옆에 있는 ‘성스러운 지혜’란 듯의 이름을 가진 아야 소피아(하기야소피아) 성당을 구경했다. 이 성당은 원래 3세기에 건립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6세기 때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새로 건축했다고 한다.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성당이었는데, 에베소의 신전 자재를 비롯해서 레바논 등 여러 곳의 신전을 지었던 건축 자재를 들여와 지었다고 한다. 그리스 정교회 최고 주교가 주재하고 있었던 이 성당은 비잔틴 시대 최고의 건축물로 손꼽힌다.

당시 왕이나 그 가족들이 마차를 타고 드나들던 문턱이며, 섬세한 설계로 지어진 건물의 구조가 감탄을 자아낸다. 특히 기둥 없이 지어진 돔의 건축술은 천 년 후 그 옆에 세워진 블루 모스크의 기술로도 따라갈 수 없었다고 한다.

후일 이 성당은 오스만의 점령으로 인해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기도 했는데, 그 영향으로 애초 없었던 네 개의 미나레트가 추가되어 있으며, 그러다 보니 이 성당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성격이 뒤섞인 특이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 이 궁전 건립으로 인한 부채로 결국 제국이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내부의 장엄했던 기독교 관련 성화들은 모스크로 개조될 때 석회로 덧칠해서 사라졌었는데, 최근 그 석회를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원형을 드러낸 것들도 볼 수 있다. 1930년대에 초대 대통령은 더 이상 이곳을 종교적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현재는 박물관으로 바뀌어 아야소피아 박물관으로 불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박물관 바로 옆에 있는 6세기 로마 시대 지하 물 저장고다. 아야 소피아 성당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먼 곳에서 수도교를 통해 끌러온 물을 저장하던 창고 역할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수 백 개의 기둥들이 땅을 떠받치고 있는데 그 기둥들의 조각이 매우 화려하고 섬세하다. 이 기둥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하나씩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 중에는 메두사 머리를 옆과 아래로 누르고 있는 기둥들도 있는데, 높은 습도와 함께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기도 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구경하느라 다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 아무리 좋은 유적이나 유물이 있다 해도 몸이 건강해야 그걸 즐기고 감상할 수 있으니 외국 여행은 다리 떨릴 때가 아니라 가슴이 떨릴 때 하라는 말이 실감된다.

오랜만에 한식 식당으로 가서 맛있게 저녁밥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내일이면 끝나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소감을 나누며 아쉬움 속에 보냈다. 평가회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의문은 그 화려하고 장엄했던 막강한 제국은 왜 몰락하고 말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 궁전에서 바다로 향한 아름다운 문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 인간 이성의 타락 때문인가, 아니면 지도자의 헛된 욕망과 무능 때문인가. 예술 작품을 평가할 때 간혹 ‘화이불치’란 말이 사용되는 걸 볼 수 있는데,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의 이 말은 유독 백제의 미학에만 적용되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이 나라의 궁전이나 성당, 모스크는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기 그지없다. 혹여 그런 절제되지 못한 욕망이 강대한 제국을 몰락시킨  원인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남은 빛만으로도 찬란한 땅

이스탄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이스탄불의 전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이고, 그 전전의 이름은 비잔티움이었다. 그리스 통치 시대에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의 작은 규모로 출발한 이 도시는 로마 제국 시절에는 당시 황제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 토카프 궁전의 외관이 볼수록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이 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이시탄불은 동로마제국의 수도였으며, 함락 후에는 이슬람 세력의 중심 도시이자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20세기까지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그러므로 이 도시는 기원전부터 현재까지 3천여 년이 넘는 긴 역사의 구심점이자 그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시 성립 이후 민족과 종교가 다른 세력들이 번갈아 점령하여 여러 번 나라가 바뀌었지만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어 앙카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약 1600년 동안 이 도시는 한 번도 수도의 지위를 내 준 적이 없었다.

이렇게 여러 나라의 수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도시의 지정학적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이 도시는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해안의 높은 언덕과 거센 물살은 바다를 통해 침입해 오는 적들을 막아내는 데 아주 유리했을 것이고, 좁다란 길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육지는 작은 병력으로 지켜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지형적 조건 때문에 이 도시를 점령하는 데는 엄청난 희생과 노력이 필수적이었을 테니 말 그대로 천혜의 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현재 이 해협에는 유명한 현수교 다리가 놓여 유럽과 아시아를 잇고 있으며 2013년에는 해저 터널이 뚫려 열차가 운행되기도 한다.

▲ 궁전 안의 여성들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나라의 영토는 유럽 3%와 아시아 97%로 구성되어 있다. 이스탄불 또한 상업과 역사 중심의 유럽(서부) 약간과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는 아시아(동부)로 나뉘어 있는데, 면적의 크기로만 본다면 당연히 아시아의 도시라고 해야 마땅하겠으나 이 나라 사람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도시를 유럽의 도시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 나라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 국가다. 아직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유럽공동체(EU) 가입이 계속 논의되고 있고, 축구를 비롯한 각종 운동 경기에서도 유럽 쪽 조에 편성되어 있는 게 그 결정적 증거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 나라가 유럽의 일원으로 살아온 까닭도 있지만, 이들이 갖고 있거나 누리고 있는 문화와 풍속이 아시아보다는 유럽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저녁 비행기를 타기로 했기 때문에 낮 시간 동안은 시간 여유가 있어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서두를 일이 없어서 아침 식사를 느긋하게 마치고, 천천히 짐을 정리하여 호텔을 나섰다.

선물을 사야 한다는 일행들의 요구로 맨 먼저 이곳 특산품을 살 수 있는 가게에 들렀다. 집을 떠나던 날 아무 것도 사 오지 말라는 아내의 부탁이 있었지만 가격도 저렴하고 품질도 괜찮다는 일행의 말에 따라 지청구 듣지 않기를 바라면서 비누와 썬 크림을 몇 개를 구입했다.

첫 번째로 찾은 곳은 피에로 로띠라는 이름의 언덕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해변 도로를 달렸다. 창밖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오가는 푸른 바다와 물 건너로 보이는 도시 풍경이 펼쳐져 풍경 사진처럼 아름답다.

▲ 궁전 안의 박물관에는 모세의 지팡이를 비롯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가 있다.

피에로 로띠는 프랑스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 해군 장교 신분으로 이곳 프랑스 주재 상무관에 근무하기 위해 왔다. 근무하는 동안 아지야데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현지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그 여자는 유부녀였고 특히 외국인과의 사랑을 금지하는 율법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근무 기간이 끝나 귀국한 그는 기자가 되었고, 동시에 시인이자 작가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사랑을 잊지 못해 다시 여기를 찾게 된다.

그러나 이미 여인은 세상을 떠난 뒤였고, 슬픔에 잠긴 그는 그 여인이 묻힌 이 언덕에 올라 추억을 되새기며 차를 마시고, 작품 집필을 하다 죽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 시신 또한 여기에 묻혔다고 하니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지고지순했는지 짐작할만하다.

이 언덕을 오르는 데는 케이블카가 있어 걷는 수고를 덜 수 있는데, 올라가는 동안 아래를 내려다보면 수많은 무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슬람의 성인 한 사람이 여기에 묻혀 있어 그의 곁에 묻히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공동묘지가 되었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내리면 바로 카페다. 로띠가 즐겨 마셨다는 홍차를 한 잔씩 준다. 카페 실내에는 로띠와 그 여인을 되새기게 하는 작품과 사진들이 여러 장 걸려 있다.

언덕에 내려다보는 풍경 또한 일품이다. 눈 아래로 툭 터진 강 같은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 묘하게 생긴 지형을 골든혼(금각만)이라고 부른다 한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 당시 황제가 여기서 빠져 죽었고, 귀족들이 적들에게 빼앗기기 싫어 금붙이 등을 바다에 버린 바람에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는데, 그보다는 정령하기 어려운 단단한 요새를 동물의 뿔에 비유하여 생긴 이름이라는 게 훨씬 믿음이 간다.

▲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가 깃든 피에로 로띠 언덕에서 내려다 본 이스탄불 시내 풍경.

여하튼 여기서 차 한 잔을 마시며 140여 년 전의 두 남녀를 회상하는 일이나, 야경이 더 아름답다는 금각만을 바라보는 시간은 마치 지상을 떠나 천상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언덕에서 내려와 다음으로 간 곳은 약 4천 개의 점포가 영업 중이라는 그랜드 바자다. 거기 도착하기 전에 버스를 타고 가면서 콘스탄티노플 성벽과 오리엔탈 특급열차의 종착역을 보았다.

성벽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견고하게 버티고 서 있어 당시 얼마나 튼튼하게 축조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었고, 오리엔탈 특급열차로 유명한 역은 유럽으로 가는 열차의 출발점이자 유럽에서 출발한 열차가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종점이라고 한다.

이 역은 이스탄불처럼 아시아의 끝이자 유럽의 시작이고, 동시에 유럽의 끝이자 아시아의 시작점이기도 하니 그 상징성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그래서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는 이 역을 배경으로 ‘오리엔탈 특급열차 살인사건’이란 작품을 썼다. 영화로 만들어진 그 작품에서 이 역은 중요한 무대가 되었는데, 시간적 여유가 없어 차에서 내려 자세히 현장을 보지 못하는 게 유감스러웠다.

그랜드 바자는 말 그대로 거대한 시장이다. 입구만도 여러 개가 있고, 출구도 열 몇 개가 있을 정도다. 시장 안의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자칫 길을 잃기 쉬운데, 가이드는 몇 번 출구 앞에서 몇 시에 만나자는 약속만 해 놓고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 놓았다. 수많은 점포들이 화려한 조명을 켜 놓고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없어 정해진 길로만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나온 곳의 점포에서는 주로 은 세공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 지어 있었다. 다른 곳에 가면 어떤 상품들이 팔리고 있을지 궁금했으나 사람 사는 세상에 팔고 사는 물건이야 다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살 것도 없고 사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나에게는 가게 앞에서 발길을 멈출 일이 별로 없다. 일행과 떨어져 대충 눈으로 훑어보며 죽 지나 출구 쪽으로 나왔다. 밖에 나오니 아직 만날 시각이 안 되어 바로 앞에 있는 사원을 구경하고, 담 쪽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현지 사람들과 비둘기들을 구경하며 기다렸다.

점심은 쇠고기 구이로 맛있게 먹었고, 해변으로 이동하여 한 시간 동안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바다가 맑고 깨끗하여 기분이 좋았다. 우리가 탄 유람선은 고속으로 바다를 질주했다. 어제 보았던 돌마바흐체 궁전을 바다 쪽에서 보니 더 아름다워 보였다. 해변에 위치한 수도원, 대학이나 고등학교 등 학교, 역사적 유래를 가진 건물들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까마득한 높이의 다리와 고색창연한 사원 건물,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룬 장관, 해변을 내려다보며 지어진 예쁜 별장 건물들, 그런 것들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구경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배여서 서 있기가 어려웠지만 일행의 누군가 말한 것처럼 이번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스케줄이라 할만 했다.

배에서 내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토카프 궁전이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골든혼, 마르마르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빼어난 경관의 언덕에 위치한 이 궁전은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이 술탄의 거처 목적으로 건축한 궁전이다.

▲ 유람선을 타고 둘러본 바다, 거기서 바라보는 육지의 풍경은 땅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실제로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옮겨 가기 전 약 4백여 년 동안 수많은 술탄들이 이 궁전에 거처했다. 궁전 안에는 사치스러울 정도의 정원, 잘 가꿔진 화단, 오래된 나무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고, 수많은 장서를 보유했었다는 도서관, 여성들만의 거처, 각종 쓰임새에 따라 나누어진 공간 등 유구한 궁전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올 듯 잘 꾸며져 있다.

물론 현재 여기는 궁전 용도가 아니라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관광 상품화했지만 곳곳에 예전 위엄을 떨치던 술탄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듯했다.

이 궁전 박물관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다이아몬드가 소장되어 있으며, 모세가 이집트에서 유대 민족을 이끌고 나오며 홍해 바다를 가를 때 사용했다는 지팡이, 침례 요한의 황금 손, 황금 단칼 등 희귀하고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걸 보려는 사람이 많아 길게 줄을 서서 적지 않게 기다려야 했다.

당연히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고 또 취향이 같지 않으니 오래 기다려서라도 그걸 꼭 보려는 사람도 있고, 반면 그냥 지나쳐 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 쪽이다. 옛날 중국에 ‘해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 지면 들어와 쉬니 임금의 힘 따위가 나에게 무엇인가’ 하는 노래가 있었는데, 제 아무리 진귀한 보물이라 할지라도 그게 먼 나라 사람인 나에게 무슨 대순가, 그런 심정이었다.

그래서 줄에서 빠져 바닷가 쪽으로 내려갔다. 간단한 차와 음료를 파는 카페가 있었는데, 거기 난간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파란 바다와 하얀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배, 아스라이 보이는 시가지, 녹음을 이루고 있는 무성한 나무들, 금방 목욕하고 나온듯한 깨끗한 털의 갈매기 등이 어울린 풍경은 그림엽서에나 나올법한 진귀한 풍경이었다.

그러기에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갖춘 술탄들이 여기에 이 궁전을 지었던 것 아니겠나. 또 수백 년 동안 다른 곳으로 옮겨 가지 않고 여기 살았던 이유 또한 이 풍광 때문 아니겠는가. 박물관 안의 진열장 안에 갇혀 있는 보물보다 나에게는 이 활짝 열린 풍광이 더 생생하고 귀한 보물처럼 생각되었다.

아무리 아름답고 진기한 구경거리가 있다 해도 배가 고프거나 몸이 피로하면 다 소용없는 일이다. 다리도 아프고 눈도 피로하니 아름다운 궁전이나 세계적 명품이라 해도 별 흥미나 관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일행보다 앞서 밖으로 나와 화단 가 돌에 주저앉으니 모양새는 좋아 보이지 않아도 우선 편해서 좋다. 거기 그렇게 퍼질러 앉아 씩씩하게 구경하느라 늦는 일행들을 기다렸다. 

약속 시각이 지나 겨우 일행이 다 모였다. 다시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가서 한식으로 이 번 여행의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술잔이 오갔지만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일이어서 흉내만 냈다.

저녁을 먹고 나서 공항으로 이동하여 출국 수속을 마치고, 지루한 기다림 끝에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12시간이 지나면 다시 떠나왔던 일상으로 복귀한다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아쉽고 한편으로는 더할 수 없이 마음이 편안해졌다.

▲ 신구 이스탄불 시내를 가르는 다리이자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연결해 주는 교량.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서 보낸 며칠의 여행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내 생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알 수 없으나 파스칼이 말했던 것처럼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었으니 그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고나 할까. 

마무리하는 말

터키는 역사도 길고, 유적도 많고, 땅도 넓은 나라다. 우리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깊은 나라이기도 하다.

현재는 광활한 영토를 거의 다 잃고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협소한 면적의 나라가 되었고, 또 강성했던 제국 시절의 영광 또한 다 사라지고 말았지만 아직도 이 나라 곳곳에는 이 나라의 것일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것이라 할 이름다운 자연유산과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널려 있다. 그래서 외국 여행을 할 때 터키는 맨 나중에 가라는 말도 있다.

이 나라의 문화유산들은 수많은 민족과 종교 세력들이 명멸하고 거쳐 가며 정복과 약탈, 이식과 개조 끝에 남긴 것들이기 때문에 그 성격이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다. 또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점에 위치한 이 나라의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동서 문화의 융합과 습합 현상도 많이 남아 있다. 한 마디로 이 나라의 문화가 어떻다고 규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과 며칠 동안 제한된 지역만 돌아다닌 주제에 감히 이 나라에 관해 무엇을 말한다는 건 만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펴본 결과 이 나라는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구축하고 보유했던 광활한 영토와 긴 역사를 상실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다.

찬연했던 제국은 처참하게 몰락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지금 그 땅에 남아 있는 빛만으로도 이 나라는 여전히 거대한 역사적 존재임을 과시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만큼 이 나라는 문화 강국이다. 비록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이런 문화유산이 없는 나라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나라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큰 복을 받고 태어난 것 같다. 최근 일부 이슬람 세력들에 의해 이 나라에서 테러가 일어나 여러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이 나라는 이를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에서 나오는 고유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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