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킴벌리 커버거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를 자주 읊조린 기억이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때는 그 의미를 정확히 몰랐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를 기울였으리라......’

17년 전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줄곧 혼자 생활해오시던 아버지는 4년 전 위암 수술을 받으셨다.

살뜰한 아내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문안 전화를 드리는 장남과 주말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국과 반찬을 정성껏 지어 나르는 둘째 딸, 그리고 아버지의 생활비와 용돈을 책임지는 막내아들이 있어 아버지의 투병생활은 그럭저럭 호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 전쯤 유례없는 폭염과 아버지의 기력이 쇠잔해지는 것을 염려한 동생들이 아버지를 요양병원으로 잠시 모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사실은 맞벌이를 하는 자식들의 처지를 고려한 아버지의 요청에 자식들은 한시적이라는 조건을 달고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셨던 것이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심지어 전화조차 띄엄띄엄 하는 큰딸에게 아버지는 한 번 다녀오기가 쉽지 않은 거리라거나 나름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 시간 여유가 없다거나 하는 등의 다양한 핑계거리를 먼저 찾아주시곤 했다.

이번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남편, 아들과 함께 KTX를 이용해 부산의 요양병원으로 아버지를 뵈러간 것은 아버지가 입원하신지 일주일 정도 지난 일요일이었다.

평상시에도 어쩌다 찾아뵙는 큰딸의 방문소식이 있으면 뻔히 도착예정시간을 아시면서도 몇 시간 전부터 베란다에 서서 멀리 고속도로를 내다보시곤 하며 조바심을 내던 아버지셨다.

이번에도 일요일에 찾아뵙겠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그날부터 내내 오는 날짜만 세다가 하루씩 앞당겨 도착예정일을 남동생에게 이야기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기력은 약해지셨을망정 성정은 여전하다고 투덜거린 터였다.

아버지는 뵙자마자 좀 어눌한 발음으로 ‘언양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셨다. 워낙 기골이 장대한 아버지는 여든의 연세에도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더랬다.

그런데  목소리에 힘이 없고 발음도 정확하지 않아 몇 번이나 귀를 아버지 입 가까이 대고서야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 같으니 집에서 돌아가시고 싶다’는 의향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워낙 번잡한 것을 싫어하시는 깔끔한 아버지 성정 탓에 병원생활이 불편해서 하는 투정 정도로 치부한 나와 동생들은 건강이 회복되시면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하겠다고 아버지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면서 아버지 건강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고 걱정하는 동생들과 괜찮아지실 거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아버지를 뵙고 온 다음 날 여동생이 왠지 아버지가 언니를 기다렸던 것 같다고 하면서 자꾸만 불안한 느낌이 든다며 훌쩍훌쩍 울었다.

그런 동생의 흐느낌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동생을 나무랐다. 그러면서 갑자기 내 목소리를 듣고 나면 영영 떠나버리실 것 같은 불길함에 아버지 휴대전화 번호를 누르다 말고 누르다 말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수면제 없이는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는 아버지의 수면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갸륵한 효심으로 통화를 내일로 미루는 그 찰나에 남동생의 전화가 왔다.

오늘 갑자기 오전에 한 번, 오후에 또 한 번 혼절하셔서 여러 조치를 하고 조금 전에 겨우 잠드셨으니까 푹 주무시게 오늘 저녁은 전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동생의 당부였다. 밤새 뒤척이다가 다음날 오전에 아버지께 전화를 걸려는 찰나에 또 남동생의 전화가 왔다.

방금 병원에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병원으로 가는 중이라고 혹시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거였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아버지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전날 두 번이나 혼절하면서도 남동생에게 전화 받기 쉽게 전화기를 목에 걸고 있고 싶다며 휴대전화 목걸이를 준비해달고 하셨다는 말이 기억나서 금방 전화를 받으실 것만 같았다.

전화벨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담당 간호사였다. 곧 운명하실 것 같다고 빨리 오라고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우리를 남겨두고 떠나셨다.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아담하고 깔끔한 아버지의 아파트에 들렀다. 유품을 정리하면서 깨지기 쉬운 것들을 쌀만한 종이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큰올케의 소리를 귓가로 들으며 안방 장롱 문을 열었다. 장롱 속에 누렇게 빛바랜 신문뭉치가 차곡차곡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었다.

작은 물건 하나도 알뜰히 정리하시는 아버지의 성품을 떠올리며 “신문 여기 있네.”하며 꺼내다가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신문 제호가 ‘금강뉴스’였기 때문이다.

가끔 아버지를 방문하는 마침 그 시기에 ‘금강뉴스’에 내 글이 실릴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러면 별 생각 없이 심심할 때 읽으시라고 가져다드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돋보기의 도움을 받아 몇 번씩이나 되읽어보곤 하신다며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그 ‘금강뉴스’를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꼬박꼬박 모아두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유품이 된 ‘금강뉴스’를 오늘부터는 내가 한지상자에 고이 모셔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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