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문학상은 여러 전문가들의 예측과 관련 도박 사이트의 베팅에서 전혀 거론되지 않던 미국의 대중가수 밥 딜런에게 돌아갔다.

백여 년 전에 이 상이 생긴 이래 정통 문학가가 아닌 러셀, 베르그송 같은 철학자, 혹은 처칠 같은 정치가가 상을 받은 적은 있어도 대중가수가 상을 받은 것은 초유의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결과를 놓고 문학 영역의 확장이라는 긍정적 견해와 정통 문학가를 모독하고 무시한 처사라는 부정적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그나저나 음유 시인으로서 저항적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선정 이유는 그렇다 쳐도, 그에게 책으로 펴낼만한 작품이 없어서 해마다 10월이면 예상되는 수상자의 작품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가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출판하여 독자들의 수요를 재빨리 충족시키면서 어려운 출판계의 활로가 되어 주던 일도 올해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우리나라 문인의 수상 소식을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허탈감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벨상을 받지 못하느냐고 따지듯 묻는 경우가 있다.

특히 늘 경쟁 대상이자 만만한 이웃으로 여기는 일본은 두 명의 문학상 수상자와 20 명이 넘는 과학상 수상자를 포함하여 약 30여 명의 수상자를 내고 있는데, 우리는 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 딱 한 분뿐이어서 더욱 자존심도 상하고 또 체면도 손상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우리도 이 상을 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국가적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 같은 것도 있다고 들었다. 이런 과감하고 획기적인 투자와 지원이 뒷받침될 때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나라에서 물리, 화학 같은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리라는 예상은 헛된 꿈이 아니라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문학상은 좀 경우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문학상은 무슨 프로젝트 진행하듯 전략을 세워 밀어붙인다고 해서 성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먼저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여부가 한 국가, 혹은 어떤 문학가의 작품 수준을 증명해 주는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 나라 문학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못 받았다고 해서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이 상이 어떤 작가의 작품 수준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도 없다. 문학 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 가치와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에 결코 점수를 매기거나 순위를 매겨 서열화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거의 평생을 문학을 전공으로 공부하고 가르치며 살아온 내 안목으로 보면 우리나라 작가들이 산출해 낸 작품들은 이 문학상을 수상한 다른 나라 작품들에 비해 결코 그 질적인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기존 수상자들보다 더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 분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직 수상자가 나오고 있지 못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문단에서도 이 상의 수상후보자 추천 의뢰를 받아 여러 차례 대상자를 추천한 적이 있다. 당시 문단에서 논의되었던 쟁점 가운데는 추천 작품 선정 기준을 놓고 인류 보편적인 주제를 다룬 것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가장 한국적이고 민족적인 내용을 다룬 것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있었는데, 어떤 것이 더 수상에 유리할 것인가를 염두에 둔 것이긴 하나 별 의미 없는 소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여러 해 동안 수상 문턱에까지 갔다고 알려진 고은 시인, 혹은 황석영 같은 작가는 그런 논쟁을 뛰어넘는 작품들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몇 해 전, 고은 선생이 살던 집 앞에 생중계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이 상의 발표 결과를 기다리던 장면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이 상에 애착을 가지고 있고, 또 수상을 열망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도 우리는 이 상을 향한 일방적 짝사랑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애착과 짝사랑이 이 상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영화 한 편 보는 돈, 프로야구 한 경기 관람하는 액수 정도밖에 안 되는 시집이나 소설 책 한 권 구입하지 않는 척박한 현실을 반성하는 게 먼저 할 일이다. 문학 작품을 일생 생활 속에서 즐기는 게 보편화되고, 노래방에서 노래 한 곡 부르는 대신 시 한 수 읊을 수 있는 문학 문화가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가 간절히 원하지 않아도 이 상은 우리에게 저절로 오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런 문학 문화가 우리 삶에 정착된다면, 그때에는 분단 해소와 더불어 민족 통일도 따라올 것이고, 비정상적인 정치권력이나 경제 질서도 바로잡힐 것이다. 이런 선진 시민의식이 잘 갖추어진 사회, 인권과 사회 규범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시대, 이는 노벨 문학상이 자리 잡을 기본적 토대이자 자양분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아직 그런 토대와 자양분이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우리에게 노벨 문학상이 오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멀리 있는 그대를 짝사랑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그 대상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짝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다.

내가 변하지 않고 상대편이 내 짝사랑을 받아 주기만을 기다린다면, 내가 좋아하는 상대는 영원히 먼 그대에 머물고 말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향한 짝사랑을 실현시킬 힘은 그 상을 수여하는 쪽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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