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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제2의 세계유산 등재 운동 첫 걸음 3
Ⅲ 계룡산의 종교와 문화재
2016년 11월 25일 (금) 12:13:28 신용희 기자 s-yh50@hanmail.net

백제역사유적지구(공주 공산성, 송산리고분군 부여 부소산성과 관북리왕궁지,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고분군 익산 미를사지, 왕궁리유적)가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개최된 제38회 세계유산등재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결정됐다. 우리나라 12번째 세계유산이다.

계룡산은 금강과 더불어 충청남도의 영산(靈山)으로 공주시, 게룡시, 논산시, 대전 유성구에 걸쳐있는 명산이다. 계룡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①콘텐츠로의 계룡산 토론회 ②계룡산의 자연환경과 문화자원 ③계룡산의 종교와 문화재 ④계룡산의 축제와 문제점 ⑤해외 세계유산(일본 히에이잔과 엔랴쿠지) 탐방 ⑥주민활동과 아카이브 등이다.

-이 기사는 충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 기획기사입니다. -

Ⅲ 계룡산의 종교와 문화재

1.불교와 유적, 유물

한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시기는 삼국시대이다. 당시 고구려가 받아들인 불교는 주로 전진(前秦)을 비롯한 북방 중국의 불교였으며, 백제가 받아들인 불교는 주로 동진(東晉)을 비롯한 중국 남방의 불교였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는 처음에는 고구려로부터 그 이후로는 백제와 중국의 남조·수나라·당나라 등지에서도 전래되었다.

이렇게 수용된 불교는 한국의 고대 신앙이나 고유 습속 등 전래의 문화와 잘 융화되어 민족문화의 훌륭한 모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역사적으로 공주는 한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불교가 많이 성행했던 지역이다. 이는 삼국시대 당시 공주가 백제의 수도로서 불교문화의 중심지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인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는 백제 불교의 중심이었다. 일찍이 겸익이 인도에서 직접 계율 경전을 가지고와 율종을 만들었으며 이후 백제의 계율은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일본 최초의 비구니가 백제에 건너와 계율을 받아가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갑사, 신원사, 마곡사가 창건되었다. 갑사는 420년(구이왕 원년)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 최초의 사찰인 선산 도리사(挑李寺)를 창건하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의 계룡산을 지나는 길에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찾아가 천진보탑을 발견하고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고려·조선시대 공주 지역의 불교는 마곡사, 동학사, 갑사를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다. 동학사는 조선 영조 즉위년에 신천영이 난을 일으켜 모두 소실되었으나 1814년 중창되었다. 갑사 또한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1654년 크게 중창되었다.

2.사찰과 유적, 유물

①갑사

동학사, 신원사와 함께 계룡산의 대표적인 사찰의 하나로서 갑사구곡(甲寺九曲)의 경관을 배경으로 풍부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갑사는 계룡산의 여러 사찰 중에서도 가장 문화재가 풍부한 사찰이며 공주시에 가까이 위치해 있다.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전언이 있다. 그 이후 웅주 출신 승려 현광(玄光)이 중국의 남악혜사(南嶽慧思)[514~577]에게서 법화삼매를 얻어 득도한 뒤 계룡산에 머무르며 895년(진성여왕 9) 등라동암(藤蘿洞菴)을 세웠다고 한다.

   
▲ 갑사 영규대제

갑사 사적비에는 신라 진흥왕의 꿈에 금빛 사람이 나타나 천축의 상서로운 신표를 주고 흰말이 나타나 비결을 바침으로써 절이 창건되었다는 설화가 소개되고 있다. 왕도 웅진과의 지리적 근접성 등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갑사의 창건은 백제시대일 것으로 보인다.

갑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거찰로서 발전한 것은 통일신라기의 일이었다. 의상대사는 1천 칸에 달하는 사찰 건물을 경영하였다고 하며, 이때 신라의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번영하였다. 그 이름이 ‘해동화엄 10찰’의 하나로서, 최치원의 글에 등장하고 있다.

갑사의 철당간과 당간 지주(보물 256호)는 통일신라기의 유산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갑사 대적전의 주변에 당시 갑사의 금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갑사 대적전의 주변에 남은 통일신라기의 잘 다듬어진 초석이 당시의 면모를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갑사는 영규대사를 중심으로 왜군에 대항하는 승병 궐기의 거점이 되었다. 영규대사는 왜병이 북상하자 승려들을 이끌고 궐기, 충청도 의병장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수복하고 충청도를 침략군으로부터 지켜내는 큰 공을 세웠으나 금산에서의 싸움에서 장렬히 순절하게 된다.

[지정문화재만 17가지]
국보 제298호 갑사삼신불괘불탱(甲寺三身佛掛佛幀)
보물 제256호 공주 갑사 철당간(公州甲寺鐵幢竿)
보물 제257호 공주 갑사 승탑(甲寺僧塔)
보물 제478호 갑사동종(甲寺銅鐘)
보물 제582호 월인석보목판(月印釋譜木板)
도유형문화재 제50호 갑사석조약사여래입상(甲寺石造藥師如來立像)
도유형문화재 제51호 갑사석조보살입상(甲寺石造菩薩立像)
도유형문화재 제52호 갑사사적비(甲寺史蹟碑)
도유형문화재 제95호 갑사강당(甲寺講堂)
도유형문화재 제105호 갑사대웅전(甲寺大雄殿)
도유형문화재 제106호 갑사대적전(甲寺大寂殿)
도유형문화재 제165호 갑사소조삼세불(甲寺塑造三世佛)
문화재자료 제52호 표충원(表忠院)
문화재자료 제53호 갑사삼성각(甲寺三聖閣)
문화재자료 제54호 갑사팔상전(甲寺八相殿)
문화재자료 제55호 갑사중사자암지삼층석탑(甲寺中獅子庵址三層石塔)
문화재자료 제68호 천진보탑(天眞寶塔)

-대웅전
갑사 대웅전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후 1604년(선조 37)에 중건되었다. 이후 1654년(효종 5)과 1875년(고종 12)에 크게 보수를 하였다.

갑사의 중심 건물로, 정면 위쪽에 가로 3.6m, 세로 1.5m 크기의 ‘대웅전(大雄殿)’ 편액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이후 새로 건립하였으며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적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목조 건축물이다.

-갑사 강당
조선 중기의 다포식 목조 건축물이다. 갑사 강당은 정유재란 당시 소실된 후 1614년(광해군 6)에 중건하였다. 1798년(정조 22)에는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으며 1890년(고종 27)에 크게 보수하였다.

1980년대에 강당 보수 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갑사 강당은 강당이 아니라 정문이었다고 한다. 고종 때 중수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강당 정면 상부에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 표충원

-표충원
1738년(영조 14) 건립된 경내의 갑사 표충원은 임란의 대표적인 승병장 휴정과 유정, 그리고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갑사 표충원의 앞마당에는 영규대사 기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10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영규대사를 비롯한 800 의승의 넋을 기리는 영규대사 대제를 지낸다.

-갑사 월인석보
갑사에 있는 『월인석보』를 찍어내던 조선 중기의 판목. 『월인석보』는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을 합하여 1459년(세조 5)에 편찬한 불경 언해서이다. 석보는 석가모니불의 연보, 즉 일대기라는 뜻이다.

『석보상절』은 1446년(세종 28)에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이 불교 서적을 참고하여 지은 것이고, 『월인천강지곡』은 1447년(세종 29)에 세종이 『석보상절』을 읽고 지은 것이다.

   
▲ 월인석보

월인석보 목판은 1569년(선조 2)에 제작되었는데, 판목의 매수는 46매로, 판각하였을 때의 장수는 184장이다. 판면의 크기는 87.3×21㎝이고, 마구리는 23×4.5㎝이다. 판면의 앞면과 뒷면에는 36×20㎝ 크기의 돋을새김이 새겨져 있어 판목 한 면에 4쪽이 인쇄되도록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단변(四周單邊), 전곽(全郭) 20×36㎝, 유계(有界), 반엽(半葉) 7행 15자, 주쌍행(注雙行), 흑구(黑口),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 판심제(版心題)이다. 목재는 계수나무이다.

『월인석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경 언해서로 15세기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국어의 변천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갑사 부도군
갑사 부도군은 조사된 부도의 개수만 총 19개 이상이다. 고승이 열반한 다음 세우는 것이 부도이니 갑사에 머물다 간 유명한 승려가 역대로 적어도 부도의 개수 이상이 된다는 뜻이다. 아쉬운 것은 부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지만 갑사를 지켜낸 옛사람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 철당간

-철당간
철당간은 높이가 무려 14m에 이르는 장대한 크기를 자랑하는데 지름 50㎝의 철통을 연결해 두 개의 지주 사이에 세운 것으로 현재 24개의 철통만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본래 28개였다가 고종 35년(1899)에 폭풍우에 의해 4개의 마디가 부러져 결실됐다고 보고 있으나, 송상기(宋相琦)[1657~1723]의 문집인 '옥오재집(玉吾齋集)'에서 갑사의 철당간이 33개의 철통이 연결되어 있다고 되어있어 기존의 연구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국립공원관리사무소 앞의 묵은밭에서는 예전부터 철을 만들고 남은 ‘쇠똥’이 자주 발견되었는데, 일설에 철당간을 만들기 위해 쇠를 녹여 만들던 곳이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철당간의 전체 높이는 15m이고, 당간지주의 높이는 3m이며, 철통의 직경은 50㎝이다. 공주 지역에 남아 있는 당간 및 당간지주 중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 갑사동종

-갑사 동종
갑사 동종은 크게 용뉴부(龍鈕部)와 종신부(鐘身部)로 구성되어 신라시대 이래 제작된 우리나라 범종의 전형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다. 범자문은 총 31자가 양각되어 있다. 고려 말기 이후 조성된 범종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갑사 동종은 중국과 일본 동종과는 차별화된 우리나라 동종만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어 신라시대 이래 조성된 전형적인 동종 양식이 조선시대까지 꾸준하게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구체적인 조성 배경과 시기를 알 수 있어 조선 전기 범종 연구의 중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
갑사가 한참 번성했던 시절에 절집이 천 칸이 넘고, 승려가 3천명이 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 쓰던 가마솥이 논에 묻혀있을 것이란 이야기를 주민들은 어릴때부터 들어왔다.

갑사의 문화재들이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한 것을 보면 그 말도 아주 헛된 것은 아닐 것으로 보이는데, 마을 노인들은 갑사 앞의 논바닥에 있으리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 갑사 승탑

- 갑사 승탑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석조 승탑[浮屠]과 탑비(塔碑)는 국사(國師)나 왕사(王師)를 역임하였거나, 그러한 지위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았을 경우 세워졌다. 승탑은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봉안한 무덤의 기능도 있었지만 사찰의 위상을 대내외에 알리는 기능도 있었다. 원래는 중사자암이라는 암자에 있었는데, 1917년경 갑사 경내로 옮겨와 세웠다고 한다. 현재는 갑사 동쪽의 대적전 앞마당에 세워져 있다.

공주 갑사 승탑은 크게 기단부와 탑신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결실된 상태이다. 지대석은 평면 팔각형이다. 기단부가 장엄하고, 정교한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다. 하대석은 상하 2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단석에는 모서리마다 연꽃잎이 활짝 피어오른 문양을 장식하여 팔각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각 면에는 볼륨이 강한 사자상을 1구씩 양각하였다.

공주 갑사 승탑은 전체적으로 신라 후기 이래 전형적인 양식이었던 팔각당형 양식을 취하고 있다. 탑신석의 사천왕상 조각 기법이나 각 부재들의 치석과 결구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우수한 치석과 조각 기법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공주 갑사 승탑은 크게 기단부와 탑신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결실된 상태이다. 지대석은 평면 팔각형이다. 기단부가 장엄하고, 정교한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다. 하대석은 상하 2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단석에는 모서리마다 연꽃잎이 활짝 피어오른 문양을 장식하여 팔각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각 면에는 볼륨이 강한 사자상을 1구씩 양각하였다.

공주 갑사 승탑은 전체적으로 신라 후기 이래 전형적인 양식이었던 팔각당형 양식을 취하고 있다. 탑신석의 사천왕상 조각 기법이나 각 부재들의 치석과 결구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우수한 치석과 조각 기법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석조보살입상
갑사 석조보살입상은 계룡산에 남아 있는 유일한 백제시대의 석불상이다. 원래 중사자암(中獅子庵)에 안치되어 있던 것을 갑사 부도 및 석조약사여래입상과 함께 갑사 경내로 옮겨졌다고 한다.

   
▲ 갑사 삼층석탑

- 갑사 중사자암지 삼층석탑
갑사 중사자암지 삼층석탑은 갑사 대웅전의 우측 곁에 위치하고 있는데 본래는 갑사의 부속 암자인 사자암에 있었던 것으로 갑사 대적전 뒤편에 이치 했으나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갑사 공우탑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있는 갑사 공우탑은 본래 갑사의 부속 암자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전해진다. 높이 293㎝에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과 기단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탑신의 초층에는 탑의 건립 내용이, 2·3층의 옥신에는 탑명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2층에는 우탑이란 명과 3층 옥신에는 공이란 명문이 각기 음각되어 있다. 옥개는 4단의 층급받침이 있는 것으로 전각의 반전이 완만하게 이루어져 있다. 탑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갑사 중창 시에 큰 공을 세운 소에 대한 기념으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천진보탑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의 계룡산 수정봉 아래에 위치한 절터에 있는 천진보탑은 문화재자료 제 68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석탑이 아니며 암자의 뒤편에 있는 거대한 자연석 바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 아소카가 쿠시나가라(석가가 입적한 곳)에 있는 사리탑에서 석가의 진신사리 8곡(斛) 4두(斗)를 발견하고 이를 84방향에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북쪽을 담당한 다문천이 신통력으로 이 자연석 바위에 넣었다고 한다.

이후 백제의 구이신왕(久爾辛王) 때 고구려의 아도(阿道)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이 바위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찾아가 사리를 발견한 다음 이 자연석 바위를 천진보탑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를 계기로 갑사를 창건(420년)하였다고 전한다.

   
▲ 동학사 대웅전

②동학사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공주 지역에서는 동학사가 창건되고 갑사가 중창되었다. 동학사는 724년(성덕왕 23)에 회의화상이 창건하여 처음에는 청량사라 하였다. 그리고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에 의하면 의상의 화엄 십찰의 하나로 갑사가 소속된 것으로 전한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중심 사상이었던 화엄 사상이 공주 지역에서도 널리 유행했음을 알게 하는 내용이다.

‘동계사(東鷄寺)’라고도 하며 동학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비구니 사찰로서 비구니 수련 도량으로 손꼽히고 있다.

   
▲ 남매탑

724년(성덕왕 23) 상원(上願) 화상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懷義)가 절을 창건하여 청량사(淸凉寺)라 하였고, 920년(태조 3) 도선(道詵)이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유차달(柳車達)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기 위해 동계사(東鷄寺)를 지었다.

그 뒤 사찰을 확장하고 절 이름도 ‘동학사(東鶴寺)’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東鶴寺)라 하였다는 설이 전하고, 또 고려의 충신이자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인 정몽주(鄭夢周)를 이 절에 제향하였으므로 ‘동학사(東學寺)’라고 하였다는 설도 전한다.

[관련문화재]
대웅전 동쪽에 ‘동학사(東鶴寺)’ 사액이 붙어 있는 실상선원이 있다. 근대의 선풍을 일으킨 경허(鏡虛)[1849~1912] 선사가 견성한 토굴자리에 세운 선원이다. 대웅전은 1980년에 지어진 건물이며, 석가여래를 주존으로 아미타여래, 약사여래가 안치되어 있다. 후불탱화로 근래에 제작된 「목각삼불탱화」와 1898년에 조성된 탱화가 동과 서쪽에 안치되어 있다.

   
▲ 동학사 삼성각

-삼성각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동학사에 있는 조선시대 불교 사원의 사당식 목조 건축물. 삼성각은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의 삼성(三聖)을 봉안하고 있는 사당 형태의 건축물이다. 대개 이 삼성을 따로 봉안하는 경우가 많은데, 동학사에서는 가운데 칠성탱(七星幀)을 중심으로 왼쪽에 「산신도」, 오른쪽에 나반존자상을 봉안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18년에 지어진 것인데, 중앙의 「칠성탱화」 좌우에 「산신탱화,「독성탱화」가 모셔져 있다. 동학사 목조 건축 중에서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 동학사 삼층석탑

- 동학사 삼층석탑
동학사 삼층석탑은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 동학사 대웅전 앞에 위치한 높이 185㎝의 조그마한 탑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이다. 서로 다른 시기의 탑재석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교체하면서 꾸민 것으로 전각골의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높이 1.76m로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3층의 탑신은 없어진 상태이다. 남아 있는 석재의 표현 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기단이 약화되고 처마의 곡선에 반전이 깊은 점 등을 들어 고려시대의 작품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청량사지 칠층석탑
계룡산 청량사 폐사지에 있는 통일신라 때의 칠층석탑으로 건립 연혁과 관련된 기록이나 변천 내용이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전체적인 탑의 조형으로 보아 통일신라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50년대에 무너진 것을 1961년에 복원하였다. 옥개석 역시 1매의 석재를 치석하여 사용했다. 2층부터 7층까지의 옥신 높이는 급격하게 낮은 편이다.

공주 청량사지 칠층 석탑은 옥개석에서 처마와 추녀의 선을 처리한 방법으로 볼 때 통일 신라 때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접해 있는 청량사지 오층 석탑이 백제 석탑의 양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면, 청량사지 칠층 석탑은 통일 신라 석탑의 양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 곳에 이처럼 서로 다른 계통의 석탑이 병립해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 청량사지 오층석탑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 청량사지 오층석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남북에 자리 잡고 있는 2기의 석탑 중 남쪽에 세워진 석탑을 말한다. 백제 멸망 후 어떤 남매가 이곳에서 수신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북쪽에 세워진 칠층석탑과 더불어 계룡산 남매탑(오늬탑)으로도 불리고 있다. 신라 양식을 따르고 있는 칠층석탑과는 달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백제 미륵사지 석탑의 각부를 모방하고 있어 백제계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③신원사
신원사는 556년(위덕왕 3) 혜명대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하며 백제 말기인 651년(의자왕 11) 열반종(涅槃宗)의 개조(開祖)인 보덕(普德)이 창건하였다고도 전한다. 열반사상은 중국 남북조시대에 남조를 중심으로 발달한 사상으로 일찍부터 남조와 활발히 교류했던 백제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여 진다. 

   
▲ 신원사

544년(성왕 19)에 이미 양(梁)나라로 사신을 파견하여 『열반경(涅槃經)』을 들여와 연구하였던 것으로 보아 신원사의 창건은 열반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원사 국제선원에서는 외국인을 상대로 한 선원도 열어 놓고 있다.

-대웅전
신원사는 계룡산의 서남방 자락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웅전은 신원사 가람의 중심에 있다. 대웅전은 가운데에 석가모니 부처를 두고, 그 좌우에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아난존자(阿難尊者)를 시립(侍立)시키고 있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때 열반종 개조인 보덕(普德) 화상이 창건하였으며, 고려 성종 때 여철 화상이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그 후 1298년(충렬왕 24)에 정암(淨庵) 화상이 중건하였으나 번창하지 못하고 조선이 개국된 직후인 1394년(태조3) 무학(無學)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말기 고종 때인 1876년 보연(菩連) 화상이 중수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신원사 대웅전의 배치적 특징은 계룡산 자락에 있으면서 주봉인 천황봉을 주산으로 삼지 않은 점과 가운데 마당의 크기가 다른 가람들보다 크다는 것이다.

   
▲ 신원사 노사나괘불

-신원사 노자나불괘불탱
신원사에 있는 야외 의식용 불화로 화불과 협시보살 및 사천왕 등 등장 인물들을 주위를 에워싸듯 배치한 뒤 바탕을 5색의 광채로 가득 채워 화려함을 더해준다. 화원 응열이 주도하여 그렸으며, 규모는 길이 11.18m 폭 6.88m에 이른다.

예산 수덕사 소장 「노사나불괘불화」와도 동일한 도상을 보여 한 계파의 작품으로 파악된다. 그림 하단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1664년에 조성되었고, 노사나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고 있는 장면인 「영산회상도」임을 알 수 있다.

   
▲ 신원사 오층석탑

- 신원사 오층석탑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있는 신원사의 계룡산 중악단 정면에 위치한 신원사 오층석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현재 오층석탑의 탑신부와 그 이상의 상륜부는 결실되어 있다. 1975년 12월 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1층 탑신의 사리공에서 사리구를 비롯하여 개원통보 등의 화폐와 녹색 유리제 긴 사리병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탑 부근에서는 사리 장엄구로 보이는 사리기 파편과 금동제 오상, 이왕상 등도 발견되었다.

④ 계룡산 중악단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신원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계룡산 산신에게 제사하던 제향 건축물. 5악, 혹은 3악으로, 한국의 대표적 산악 신앙의 대상이었던 계룡산신에 대한 고대 이래의 제사처라는 데 큰 의미가 있으며, 조선 말기 궁궐 건축에 준하는 종교 건축물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 중악단

계룡산 중악단은 계룡산신을 모시는 제단으로서, 다포 팔작집의 화려한 공포 구성을 통해 건물의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내부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셨다.

1879년(고종 16) 중수한 건축한 건물이지만, 계룡산신에 대한 제사 공간으로서의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계룡산은 신라의 제사 규정에서 중사(中祀)에 속한다. 신라 5악 신앙에 의한 국가적 제사의 전통이 후대로 계승된 것이다. 18세기의 「계룡당기(鷄龍堂記)」라는 제사 자료와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기록으로 보아 계룡산 중악단은 ‘계룡산사→ 계룡당→ 계룡단’의 계승인 셈이다.

2.유교와 유적, 유물

홍살문은 향교나 관아 입구에서 보는 유교의 문화유적으로 동학사 내에 충신을 기리는 동계사, 삼은각, 숙모전이 있기 때문이다. 이 3사는 유교식 사당이다. 동학사 입구의 홍살문도 사찰 내의 유교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해준(공주대) 교수는  “계룡산 문화가 중악단으로 대표되는 신원사를 巫-佛 문화로, 숙모전으로 상징되는 동학사는 儒-佛 문화로, 갑사는 佛-佛 문화로 구분된다”며 “계룡산의 정신사적 전통 중 근자 4-500 년의 큰 갈래가 바로 숙모전(동학 3사)의 충절 전통”이라고 밝히면서 “국가지정 목록과 대상을 세부적으로 검토할 필요성, 정신사적 전통, 역사기록과 근거자료 등을 들어 문화유산 가치와 준비사항에 대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①계룡산 초혼각지
조선 전기 단종(端宗)을 받들던 충신과 열사들의 혼령을 제사지내던 건물 터로 동학사 동편에는 숙모전(肅慕殿)과 삼은각(三隱閣), 동계사(東鷄祠)가 위치하고 있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이 절과 초혼각이 모두 소실되었고, 1785년(정조 9) 정후겸(鄭厚謙)이 위토를 팔아버리자 제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814년(순조 14) 월인(月印)이 예조에 상소하여 10여 칸의 사옥과 혼록봉장각(魂錄奉藏閣)을 세웠다. 초혼각은 1904년 숙모전(肅慕殿)이라고 개칭하였다. 6·25전쟁 때 옛 건물이 모두 소실되자 1960년 이후에 중건하였다.

1456년 (세조 2)에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이곳에 제단을 마련하고 초혼제(招魂祭)를 올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나라에서 단종·안평대군 등의 종실 인물과 김종서·황보인 등 당시 죽음을 당한 280여 충신과 열사들의 위패를 모시도록 한 초혼각(招魂閣)을 세워 초혼제를 지내니 이 초혼단이 오늘날 숙모전(肅慕殿)의 효시이다.

특히 이 터는 전통시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기개로 사절(死節)해 간 충신열사들을 공주지역의 유림과 불교계가 합동으로 봉행하였다는 점에서, 또한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정성으로 초혼하던 건물이 있던 곳이라는데서 유교적 가치관이 극명하게 드러난 곳으로 평가하고 있다.

   
▲ 숙모전

②숙모전 대제
숙모전대제의 시작은 조선 초기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지낸 초혼제로부터 시작되었다. 길재는 1394년(태조 3) 동학사의 서쪽에서 고려의 왕과 스승에게 제사를 지냈고, 1399년(정종 1)에는 금헌(琴軒) 유선생(이름 미상)이 단을 만들어 고려의 왕과 포은·목은을 초혼하였다. 이후 1400년(정종 2) 이정간(李貞幹)이 수령으로 부임하여 비로소 각(閣)을 세웠다. 이어 여기에 야은 길재를 배향하여 양은각(兩隱閣) 또는 삼은각(三隱閣)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후대에 오면서 제사를 주관하던 동학사와 초혼각이 불타고, 하사받았던 토지 등 재산도 없어져 제향이 중단되었다. 1814년(순조 14) 이후 절과 초혼각의 중건이 시작되어 1830년 완공되었고, 뒤에도 몇 차례 중수와 증축을 거쳐 1956년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1963년 숙모회가 발족되어 봉안 대상과 의례 절차를 정비, 매년 봄(春享 봄 제사 3. 15)과 겨울(冬享 겨울 제사 10. 24) 두 차례 제향을 거행하고 있다. 춘향일은 매월당 김시습 등이 단종의 원혼을 불러 최초로 제사한 날에서 비롯된 것이며, 동향은 단종이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된 날을 택한 데서 비롯되었다.

제향은 ①축원제, ②숙모전제, ③삼은각·동계사제의 3단계 절차로 이루어지는데, 당일 10시경에 먼저 동학사 대웅전에서 축원제를 지낸다.

이는 동학사의 주지 및 승려가 주관하며, 봉안 대상자를 축원문에서 거명하면서 불교 의식으로 치르는데, 유림 대표도 참여한다. 숙모전대제는 비록 중간에 중단된 적은 있었으나, 조선 초기부터 행해온 오래된 제례 의식이며, 특히 불교와 유교의 의식이 함께 거행되는 큰 규모의 의식에 속한다.

   
▲ 삼은각 동계사

②삼은각(三隱閣)
1394년(태조 3) 고려의 유신(遺臣) 길재(吉再)가 동학사의 승려 운선(雲禪)과 함께 단(壇)을 쌓아서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1399년(정종 1) 고려 유신 유방택(柳芳澤)이 동학사에 와서 정몽주·이색(李穡)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다음해 이정한(李貞翰)이 공주목사로 와서 전각을 세웠다. 길재가 죽자 세 사람만의 제를 지내고 그들의 호를 따 삼은각(三隱閣)이라 하였다.

1457년(세조 3) 김시습(金時習)이 조상치(曺尙治)·이축(李蓄)·조려(趙旅) 등과 더불어 삼은단 옆에 단을 쌓아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단종의 제단을 증설하였다.

다음 해에 세조가 동학사에 와서 제단을 살핀 뒤 단종을 비롯하여 정순왕후(定順王后), 안평대군(安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정분(鄭奔) 등과 사육신, 그리고 세조 찬위로 원통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인신(印信 : 도장)과 토지 등을 하사하였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한 다음 승려와 유생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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