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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사람의 본심을 읽어라
2016년 12월 27일 (화) 14:41:54 홍혁기 3777@kknews.co.kr

   

君舟臣水(군주신수)

임금은 배요 신하는 물이란 뜻으로 사공이 물의 성질을 잘 알아서 배를 다루듯이 임금이 민심을 정확히 파악하여 백성을 이끌어야 함을 일컫는다. 재주복주(載舟覆舟)라고도 한다. [후한서 後漢書권 65]

후한(後漢)때 인물 황보규(皇甫規)는 이름난 장군이었다. 141년(영화(永和) 6)티베트계의 유목민 강(羌)이 삼보(三甫)를 대거 침공하여 안정(安定)을 에워쌌다.

정서장군 마현(馬賢)이 여러 고을의 병사를 이끌고 공격에 나섰으나 전과가 없었다. 이때 황보규는 평민신분으로 마현의 작전을 보고 토벌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글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현이 강에게 해를 입자 고을 장군이 황보규가 계략이 있음을 알고 공조(工曹)로 삼아 갑사 8백 명을 내어주니 강과 싸워 크게 물리쳤다.

양태후(梁太后)가 수렴 청정할 때 황보규는 비로소 현량방정(賢良方正)이란 관리 임용시험에 응해 대책문(對策文)을 올렸는데 당시 권력자 대장군 양기(梁冀)를 공박하는 내용이었다. 양기는 발호(跋扈, 권세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날뜀)하다라는 문자가 붙은 인물이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입니다. 여러 신하는 배에 탄 손님이요, 장군 양기의 형체는 노를 젓는 사공입니다. 성의를 다해 배를 저어야 나라의 복이 되는데 나태하고 거드름만 피우니 마침내는 거센 물결에 삼켜지고 말 것입니다.’

화가 난 양기는 황보규의 성적을 최하로 주고 낭중(郎中)에 임명했다. 황보규는 신병을 이유로 취임치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양기의 사주를 받은 고을에서도 황보규를 두서너 차례나 죽음에 이르도록 모함했으나 끝내는 죄 없음이 밝혀지곤 했다.

황보규는 고향에서 「시경(詩經)」·「주역(周易)」의 교수로 후진을 양성했는데 문도(門徒)가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양기가 죄를 얻어 죽자 나라에서 다섯 번이나 황보규를 불렀으나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숙손무기(叔孫無忌)란 자가 태산(太山)에 근거를 두고 도둑의 무리를 이끌고 여러 지역에 출몰하며 노략질을 했다. 중랑장 종자(宗資)가 토벌에 나섰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특명으로 황보규를 태산태수(太山太守)에 임명하여 도둑떼를 소탕했다.

161년(연희(延熹) 4), 강이 다시 침공해 왔다. 황보규는 중랑장이 되어 관서병(關西兵)을 이끌고 적 8백여 명을 베는 대전과를 올렸다. 강은 황보규의 위엄에 두려움을 느끼고 10만여 명이 투항했고 이듬해 농우(隴右)의 강을 토벌하러 나서자 강이 사자를 보내 항복하겠다 하였다. 황보규는 의랑(議郞)이 되고 후(侯)에 봉해졌다.

내시 서황(徐璜)이 뇌물을 얻어내려고 사람을 보냈으나 황보규는 응하지 않았다. 관속들이 뇌물을 주자고 청했으나 황보규는 단연 거절했다. 쾌심하게 여긴 서황은 강이 항복한 것은 진심이 아니요, 황보규가 뇌물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모함하여 황보규는 구속되었다. 여러 관원 및 태학생 3백여 명이 궐문에 모여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마침 대사령이 내려지며 황보규는 석방이 되었다.

도요장군(度遼將軍)에 임명된 황보규는 부임한지 수개월에 중랑장 장환(張奐)을 후임으로 추천하여 교체되었다가 장환이 대사농(大司農)으로 옮기면서 다시 도요장군이 되었다. 주요직책에 연임되자 황보규는 병을 핑계로 물러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럴 즈음 친구 상군태수(上郡太守) 왕민(王旻)이 상을 당했다. 황보규는 관할을 벗어나 하정(下亭)이란 곳까지 가서 조문을 했다. 이 사실을 병주자사(幷州刺史) 호방(胡芳)에게 밀고한 자가 있었다.

“황보규가 관할을 벗어나 법을 어겼습니다. 위에 보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호방은 못들은 체했다.

“황보규는 관직에서 물러나려고 고의로 이런 짓을 한 것이다. 나는 인재를 아끼려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 이 사람의 행동에 말려들 수 없다.”

황보규는 홍농태수(弘農太守)로 옮기고 수성정후(壽成亭侯)에 봉해져 식읍으로 2백호가 주어졌으나 봉후(封侯)만은 사양했다. 호강교위(護羌校尉)로 있다가 병으로 소환되어 돌아가다가 곡성(穀城)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황보규가 대책문에 인용한 ‘임금은 배요, 신하는 물입니다.(君舟臣水)’는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그 배를 뒤엎기도 한다. 임금이 이 뜻을 마음에 새겨서 위험을 생각한다면 지혜로워진다.’고 말을 인용한 것이다.

출판사 다할미디어 (02)517-9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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