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회 해산총회 인사

공주 출신 일본인으로 구성된 일본의「공주회(公州会)」는 2016년 4월,제26회 전국집회 치바대회를 끝으로 52년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공주회」를 성원해주신 여러분께 공주회의 마지막 회장으로서 감사드립니다.

▲ 공주회 해산총회를 마치고(2016년 4월)

공주회(公州会)는 1964년 4월 1일 회칙을 제정하고, 이 날을 발족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공주 출신들에 의한 집회가 4회 개최되었습니다. 4회째의 집회가 1964년 3월에 개최되었고 이 집회에서 「공주회(公州会)의 전국조직을 결성하는 것이 발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1회 전국집회는 1965년 11월에 교토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회원수 109명, 참가자 42명이었습니다. 그 후 차츰 회원수가 증가하여, 1999년 고토히라대회 때는 264명에 달했습니다. 해방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회원의 권유를 받고 입회한 것이지요. 저도 그 중 한사람입니다.

회보인 ‘공주회통신’은 제1회 집회 전인 1965년 6월에 제1호가 발행되었습니다. 제12호부터는 타이프로 치게 되었습니다. 제본 인쇄는 제25호부터 제61호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회원 증가에 의한 회비증가와 회원의 기부가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제62호부터는 컴퓨터에 의한 수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외 수시로 ‘공주회 단신(公州会短信)’과 ‘공주회 임시통신(公州会臨時通信)’이 발행되었습니다. 회보는 가리반(ガリ版), 타이프, 제본, 컴퓨터 등과 같이 작성 방법이 변화되어 갔습니다만, 한편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주회 회원의 고령화로 인한 회의 존속문제가 과제로 나왔습니다. 해방 당시에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저희가 가장 젊은층이었으니까요. 집회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곤란하기 때문에 해산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의견이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제 22회 아타미 대회에서도 해산이 논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아메미야 이사장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원회에서 해산에 대해 검토했다고 들었습니다. 임원회는 회원들의 앙케이트를 참고로 당분간 회비 징수를 중지하고, 회의 운영은 조성금으로 운영하며, 해산이 적당하다고 판단될 때는 총회에서 해산하기로 결론을 내고 제23회 가라츠대회에서 승인했습니다. 회는 당분간 존속하지만 종국에는 해산한다는 결론입니다. 여러분들과 상의한 결과가 이번의 해산총회였습니다.

공주회처럼 특정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회를 조직해서 그 관계를 소중히 하는 존재는 드문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주라는 토지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요. 서울, 대전, 부산 등의 대도시에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공주분들은 공주회를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공주회는 해산했습니다만, 공주와의 인연은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해산을 앞두고 국립공주박물관에 공주회 기념식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치바(千葉)에서의 해산 총회에는 공주에서 4분의 내빈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공주대학교 윤용혁교수는 치바시의 꽃인 「오가하스(大賀ハス)」연꽃에 흥미를 갖고 치바공원까지 보러 갔습니다.

「오가하스(大賀ハス)」연꽃은 치바에서 발견된 2천 년 전의 연 씨앗을 발아시켜 연꽃을 피우는데 성공한 세계 최고(最古)의 꽃입니다. 윤교수는  공주 땅에 「오가하스 연꽃」을 피워 공주회와의 인연을 공주에 남기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공주회와의 끝은 공주와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공주회와의 인연이 공주에서 2천 년 전의 연꽃으로 다시 피워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번역 나정희)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