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을 앞두고 만해 한용운 스님을 생각합니다.

스님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겨질 일생을 살아 오셨으니 만해를 모르고는 불교를 모르고, 만해를 제하고는 독립 운동사를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이미 널리 알려 진 만해 스님을 논하기보다 같은 시기에 공주 마곡사 주지를 살기도 하신 만공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일제는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서 종교계까지도 치밀한 마수를 뻗치고 그 가운데 불교계를 향한 당근과 채찍의 양면 정책을 취합니다.

곳곳에 일본 불교의 포교소를 설치하여 내선일치를 강요하고 스님들과 불교도들에게 성스러운 대동아전쟁에 참전하라는 격문과 연설을 강요하거나 요구하였으며 조선 불교도들에게는 조선조에 억눌리면서 도성 출입조차 제한되었던 여러 가지 제약을 풀어 주는 동시에 청정하게 살아 온 스님들에게 결혼을 허용하는 것을 법으로 만들어 조선 불교를 왜색화 합니다.

그러면서 전국의 사찰을 삼십일 본산으로 나누어 구역을 정하고 본산 제도 속에서 주지를 선출하게 하는 등 조선불교는 여러 가지 새로운 변화의 소용돌이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주지라는 자리는 대중 가운데 덕망이 있는 스님을 주지로 모셨기에 만약 자신에게 소임이 맡겨지게 되면 밤사이로 걸망을 싸서 도망치듯 한 뒤 수행의 길로만 매진하던 스님들의 풍토였건만 선거라는 제도가 도입되면서 각종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입니다.

1937년 만공스님이 총독부에서 열린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였을 때 미나미 총독이 전임 데라우치 총독의 치적을 나열하면서 조선 불교를 위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자화자찬을 할 때 대부분 본사 주지스님들은 말없이 듣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때 마곡사 주지였던 만공스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임 데라우치 총독은 청정한 수행가풍을 이어 내려 온 한국 불교의 근간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기에 죽어서 지옥으로 밖에는 갈 곳이 없는 인물인데 어디서 그런 자를 칭찬 하는가” 하고 벽력같은 사자후를 하였다 합니다.

총칼이 난무하는 서슬 퍼렇던 총독부에서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모두가 이 난감한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마음속으로 염려를 하였지만 다행히 만공스님의 사자후에 대하여 별다른 논의나 추궁 없이 어색한 회의가 마쳐집니다.

만공스님은 그 길로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의 만해 스님을 찾아가서 총독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만해 스님은 박장대소를 하고 좋아하면서 “형님스님 참으로 잘 하셨습니다만 아예 주장자를 들고 총독을 한대 후려갈기지 그랬느냐” 하고 한마디를 거들었습니다.

만공스님은 웃으며 “어리석은 곰은 몽둥이를 들지만 영리한 사자는 벽력같은 소리와 포효 하나로 뭇 짐승을 압도하는 것이라네” 하고 응수하였다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해와 만공스님의 걸림 없는 방과 할을 볼 수 있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내놓고 몸을 희생하며 독립운동에 동참하였을 때 만공스님 같은 이는 총독 앞에서 일본이 하고 있는 부당한 일에 누구도 하기 어려운 직언 직설을 서슴지 않았으니 이 또한 일본 총독을 상대로 한 또 다른 직접적인 형태의 독립운동에 다르지 않음을 봅니다.

이때에 만해 스님은 만공스님에게 형님 같은 도인스님이 대한의 독립을 위해 천일기도를 올려 주십사 청하였고 만공스님은 그 길로 간월암으로 들어가 기도를 시작하셨다 하지요.

그렇게 바라던 독립을 만해 스님은 보지 못하고 돌아가고 만공 스님 같은 도인스님의 용맹정진 덕분이었던지 몰라도 천일기도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은 독립을 하게 되니 기필코 맞이하게 될 조선의 독립에 관한 미래의 결과를 내다 본 만해 스님의 혜안과 만공스님의 정신이 놀랍기만 합니다.

3.1절을 맞이하여 나라 잃은 슬픔과 고통, 백성의 고난과 민족의 치욕스러웠던 36년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일본의 무자비한 폭정과 식민정책 앞에서도 끝까지 조선과 조선 백성을 위하여 각계각층에서 자신들의 몸을 불사른 독립 유공자와 가족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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