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무 천황(桓武天皇)의 모친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 新笠)

백제 제25대 무령왕은 461년(혹은 462년)에 태어나 웅진시대 재위 23년간 백제를 갱위강국(更爲强國)으로 중흥시킨 인물이다.

그는 중국 남조의 ‘양나라’ 그리고 ‘왜’와의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외교정책을 펼쳐 해상왕국 백제로서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를 이루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주인공은 무령왕릉이고 2021년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 된다. 4년 후에 우리는 세계유산인 백제문화를 어떻게 콘텐츠化하여 세계에 알리는 한편 백제의 후예로써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지금부터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본지는 무령왕과 관련한 해외 유적을 찾아 무령왕 콘텐츠를 발굴, 백제역사문화 개발에 기여하고자 ‘무령왕 콘텐츠 해외 탐색’ 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첫 번째로 백제 무령왕 후손이자 일본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어머니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 新笠)의 릉을 찾았다. 답사일은 2016년 8월 29일이다.

1. 무령왕의 후손 타카노노 니이가사를 찾아가는 길

지난해 여름의 끝자락이라지만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8월 하순, 무령왕의 후손 고야신립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교토시관광협회 안내책자에도 나와 있지 않은 무덤은 현지 가이드가 인터넷을 한참 헤매다 얻은 정보를 기초로 가츠라역에서 차로 20여분을 달려 한적한 오오에(大枝)마을에 도착했다.

▲ 교토에 있는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능

입구에서 ‘간무천황어모어능참도(桓武天皇御母御陵參道)’라 새겨진 돌비석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이란. 이곳에 백제 중흥인물 무령왕의 후손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 新笠)의 무덤이 있다니...

교토 서부지역에 구츠카케 산기슭에 위치한 간무 천황의 생모인 백제계 여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 新笠)의 무덤(오오에로 大枝陵)을 찾아가는 길은 커다란 대나무 숲이 양쪽으로 하늘을 가릴 만큼 우거져 스산하기까지 했다.

시야를 가리던 대나무 숲을 벗어나니 저 만치 고야신립 릉이 보인다. ‘고닌천황(光仁天皇)의 왕비’라고 쓴 무덤 표지판 뒤로 울창한 나무숲이 병풍처럼 둘러싸여져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릉을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간무 천황의 생모이자 고닌 천황의 왕비 무덤치고는 너무 조촐하다는 느낌 속에 일행은 먼저 예를 갖추고 묵념을 올렸다. 천 년 전 이곳에 도래한 멸망한 나라 백제인의 고달팠을 행로와 천황의 왕비에서 아들을 천황으로 옹립하면서 궁궐의 권력 암투 속에서의 백제 여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유추해 보기도 했다.

▲ 오오에 마을 입구의 안내비석

천황의 어머니의 릉을 이곳에 모신 것은 필시 사연이 있을 것이었다. 혹시 이 일대가 옛날 백제인의 터전이었을까?

일본 제 125대 천황인 아키히토는 2001년 12월 23일 만 68세 생일을 맞이하는 기자회견에서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느낀다”라고 발표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백제 도래인계 일본 간무 천황(桓武天皇)은 누구인가

간무 천황은 ‘교토의 오야가미(祖神 조상신)’라 불린다. 교토에 있는 간무천황의 사당인 헤이안궁은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며 교토 시민들이 오야가미(祖神 조상신)라 여기며 발길이 줄을 잇는 곳이다.

간무 천황(桓武天皇 737년 ~ 806년 음력 3월 17일 재위: 781년~806년)은 일본의 제50대 천황이다. 간무 천황의 이름은 야마베노미코(山部親王)로 아버지는 일본 제49대 고닌 천황(光仁天皇, 709~782), 어머니는 백제인의 후손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790)이다.

고닌 천황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재위한 덴치(天智. 재위 661-671)의 손자이므로 계보로만 따지면 간무는 덴치의 증손자인 것이다.

▲ 오오에 능으로 가는 길의 대나무 숲

간무는 드라마틱한 생을 산 인물이다. 그는 어머니가 백제 도래인 계열이었고 또한 정실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변변찮은 생을 보낸다. 764년 종5위하가되고 2년 뒤 종5위상(從五位上)으로 진급한다. 그런 그에게 일대 기회가 온 것은 37세 때인 773년 1월2일 고닌천황의 황태자였던 오사베노미코(他戶親王)가 황후인 어머니가 죄를 받아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된 사건이었다.

고닌은 후임 황태자로 간무를 세운 것이다. 그는 781년 4월3일 풍질과 노쇠를 이유로 아버지 고닌이 퇴위함에 따라 천황에 즉위했다.

간무 천황의 대표적인 업적은 794년 도읍을 나라(奈良)에서 헤이안쿄로 옮겨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를 열었고 이후 교토는 1000여년에 걸쳐 일본의 수도가 되었다. 말하자면 천년 교토시대를 연 주인공이 간무 천황인 것이다. 간무 천황은 나라에서 헤이안으로 천도할때 엄청난 재산을 함께 옮겼다.
또 정부 조직과 기능을 개선하려고 시도한 적극적인 천황이었으며 천황의 치세는 25년간 지속되었다.

3. 간무 천황의 생모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 新笠)

간무를 낳은 화씨부인은 나중에 다카노노 아소미니이가사(高野朝臣新笠  ?-789)라고 일컫게 되는데 바로 이 여인이 백제계이다.

각종 기록에 화씨부인은 그 아버지가 倭 왕실의 조신(朝臣)인 야마토노 오토츠쿠(和乙繼)이다. 이 야마토노 오토츠쿠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에게 닿는다.

▲ 오오에 능 안내판

서기 720년 편찬 완료된 고대 일본정사인 「일본서기」를 보면 무령왕 아들로 순타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즉 이 책 게타이천황 7년(513) 가을 8월 조에 보면 “계미일이 그 달 첫날인 이 달 무신 날(26일)에 백제 태자 순타가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이 정확하다면 백제 제26대 성왕(성명왕. 재위 523-554)은 무령왕의 맏아들이 아니라 형 순타가 일찍 죽는 바람에 태자가 되어 즉위했음을 알 수 있다.

한데 같은 「일본서기」에서 일본 역사상 폭군으로 가장 악명높은 전왕 부레쓰(武烈. 재위 499-506) 7년(505) 여름 4월 조를 보면 무령왕이 왕자 사아군을 일본 조정에 보내 천황을 섬기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면서「일본서기」는 이 사아군(순타태자)이 아들을 낳으니 법사군이라 하고 그가 바로 야마토노키미의 선조가 된다는 부연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학계 대다수가 법사군을 낳은 사아군을 곧 순타태자로 보고 있다.

▲ 오오에 능 전경

이것이 맞든 틀리든 하나 분명한 것은 무령→사아군→법사군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중에 간무 천황을 낳은 화씨부인에게까지 연결된다는 점이다.  일본 아키히토 천황이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계라는 언급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4. 교토는 일본의 정신적 지주

교토 답사를 인솔한 윤용혁 교수는 “일본 역사와 함께한 천년의 고도 일본 교토는 아스카시대와 나라(奈良)시대를 거치면서 중국과 한반도의 백제, 신라로부터 문물을 도입, 고대 일본의 토대를 쌓았다. 간무 천황이 794년 지금의 교토로 수도를 옮기면서 교토의 헤이조코(平城京)를 중심으로 한 헤이안(平安)시대를 열며 정치, 문화를 꽃피운 왕이었다”고 교토의 천 년 수도 역사를 설명했다.

이어 “1868년 도쿄(東京)에 수도를 내어주기까지 천 년 간 수도 역할을 해 온 교토는 일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왔기 때문에 왕궁, 사찰 등과 함께 일본 전통의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17건의 세계유산 등재가 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교토의 간무천황 도리이

지난 2005년에는 간무 천황의 헤이안 천도 1200년 행사가 교토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일본인들이 칸무천황을 ‘교토의 오야가미(祖神 조상신)’라 불린 것을 보면 간무 천황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것을 알 수 있다.

백제를 갱위강국으로 이끈 무령왕의 동아시아 중심 인물인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 4년 앞으로 다가오면서 우리가 세계유산인 ‘무령왕 콘텐츠’ 개발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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