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선화부 水仙花賦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 ~1856) 조선 19세기, 23.5 x 60.8cm, 탁본, 제주 추사관

봄은 아직 멀리 있고 바람은 쌀쌀해서 겨울외투를 입고 있는데 강진 땅 백련사 공양간 옆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수선화가 피었다.

작년 이맘 때, 점심공양을 하고 나오는데 여현 큰스님이 환한 미소로 수선화가 피었다고 반갑게 얘기해서 본 꽃이다. 무심히 지나쳤는데 스님의 말에 발밑을 보니 한편에 무리지어 소담하게 피어있었다. 올해에도 점심공양을 마치고 나오며 눈여겨보니 작년보다 포기가 늘었고 따뜻한 햇볕을 받아 활짝 피어있다.

쌍달리에 집을 짓고 마당에 꽃밭을 만들 때가 생각난다. 옆 마을 고성리에 꽃가꾸기를 잘하는 분이 있어서 구경을 갔다가 이것저것 캐 줘서 욕심내서 많이 받아왔다.

그 중에는 수선화가 한 아름 가장 많았다. 귀한 꽃을 나눠 준 고마운 이웃 덕분에 수선화, 붓꽃, 창포, 앵초, 상사화 등을 마당에 심었다.

그런데 비가 오면 꽃밭에 물이 잘 빠지지 않고 질퍽하게 고여 있어서 마사토를 더 올려주며 미처 수선화를 옮기지 못했다. 흙속에 묻혀버린 꽃에게 미안하고 그 꽃을 나눠준 분에게도 미안하며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이듬해 봄에 무거운 흙을 뚫고 새부리 같은 초록색 싹이 뾰족하게 올라와서 고맙고 반갑고 신기했다.

아랫동네보다 1~2도 온도가 낮은 쌍달작은도서관은 봄이 늦게 찾아오고 3월 말이나 되어야 싹이 올라오고 수선화를 볼 수 있다.

강진 백련사 고개 너머에는 다산초당이 있고 해남 대흥사 일지암은 초의선사와 유배 온 다산 정약용, 그리고 제주도 유배 길에 머물렀던 추사 김정희가 차를 매개로 함께한 곳이다.

추사와 다산의 인연은 그보다 먼저이다. 봄에 수선화를 만나면 백련사 수선화가 생각나고 세대를 초월하고 교류했던 다산과 추사가 떠오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귀한 선물을 보내는 이의 마음은 늘 설레고 행복하다. 그것이 귀한 꽃이라면 더욱 아름답다.

유홍준의 국보순례에서 추사의 수선화부 탁본이야기를 잠시 빌려온다.

추사는 24살 때 아버지(김노경)를 따라 연경에 가서 처음 이 청순한 꽃을 보고 신선한 감동을 받고 아주 사랑하게 되었다.

43세 때는 평안감사인 부친을 뵈러 평양에 갔다가 때마침 연경에 다녀오는 사신이 평안감사에게 수선화를 선물하자 아버지께 그것을 달라고 하여 짐꾼을 시켜 남양주 여유당에 계신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보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다산은 기쁜 마음에<수선화>라는 시를 지었다.

신선의 풍모에 도사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우리 집에 왔다
지난날 이기양이 사신 길에 가져오더니
추사가 또 대동강가 관아에서 보내주었다
어린 손자는 처음 보는지라 부추 잎 같다고 하고
어린 여종은 마늘 싹이 일찍 피었다고 놀란다

그리고 1840년, 추사가 나이 55세에 제주도에 유배 와보니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 수선화였다. 그러나 농부들은 보리밭에 나 있는 아름다운 꽃을 원수 보듯 파버리며 소와 말 먹이로 삼고 있었다.

추사는 하나의 사물이 제 자리를 얻지 못하면 이런 딱한 일을 당하고 만다면서 처량한 감회가 일어 눈물이 나는 것을 금치 못하겠다며 그림과 함께 애잔한 시 몇 수를 지었다. 자신의 처지를 이 버림받은 수선화에 비유했던 것이다.

한 점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어라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에 냉철하고 영특함이 둘러있네
매화가 높다지만 뜨락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서 참으로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푸른 바다 파란 하늘 한 송이 환한 얼굴
신선의 인연 그득하여 끝내 아낌이 없네
호미 끝에 베어 던져진 예사로운 너를
밝은 창 맑은 책상 사이에 두고 공양하노라

주변을 둘러보아 발밑에 피어있을 흰색, 노란색 수선화를 찾아보자. 그리고 용케 찾게 되면 노래 수선화를 흥얼거려도 좋을 것이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에 날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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