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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언론지원사업 기획기사-유구직물 1
2017년 08월 10일 (목) 11:48:04 신용희 기자 s-yh50@hanmail.net

유구직물 기획의 의미

정감록에 나와 있는 십승지(十勝地)중의 하나인 유구에서 직물업이 발달하게 된 계기는 해방 전 섬유산업이 발달했던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 북한지역의 직조업자들이 8.15해방과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이곳으로 내려와 가정에 목제 직기를 설치하여 우모직을 생산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 유구가 직물산업의 토대가 되었다.

유구직물이 번창하던 1960년대에는 지나가는 개들도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주의 돈줄을 이곳 유구에서 좌지우지했다고 한다. 이처럼 직물업이 발달을 하면서 호황을 누렸던 곳이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제는 60여 개 업체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유구직물산업의 어제와 오늘의 현주소를 재조명하여 중국 등 저가직물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한편  예전 활발했던 유구직물산업의 부활을 모색하고자 이번 ‘유구직물산업의 활성화’ 시리즈를 기획했다. 4회로 연재할 이번 기획에는 신용희 기가, 임동숙 기자, 선우현 기자가 취재했다./편집자

-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 기획기사입니다.-

1. 유구직물의 역사
2. 유구직물산업의 현황과 방향 모색
3. ‘유구직물 활성화 방안’ 토론회
4. 폐공장의 활용 방안

1 유구직물의 역사

8.15해방 후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지역에는 소련군이 주둔을 하면서 이들의 핍박에 불안을 느낀 주민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새로 이전할 지역을 물색하던 중 정감록에 나와 있는 10승지를 대상지역으로 선정하고 경북 영주 풍기읍, 경북 안동시 등을 사전에 여러 번 답사를 거친 후 그 중 유구가 제일 살기 좋은 곳으로 판단되어 이곳에서 정착을 하게 되었다.

이때 북한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은 경작할 땅을 갖고 있지 못했기에 호구지책으로 수직기를 직접 제작하여 직조를 시작하면서 유구에서 직물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 십승지 로고

1950년도에 10여 호로 시작한 직조업이 1955년도에는 100여 호로 늘어났고, 1960년도부터는 피난민뿐만 아니라 유구의 원주민들까지 합세하여 1,000여 호로 늘어났으며 3,000여대의 직기와 ‘삼천공녀(工女)’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직물업 종사자가 늘어나면서 유구에서 생산된 인조견이 전국 생산량의 70%를 웃돌 정도로 인견생산지로 명성을 날렸다. 

   
▲ 삼천공녀들이 퇴근 후 발을 씻었다는 유구천

이처럼 직물업이 발달을 하면서 호황을 누렸던 곳이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제는 60여 개 업체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직물업 종사자의 평균연령이 50대 중후반으로 이는 직물산업이 인건비 및 원자재값 상승 등으로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더 이상 젊은 층이 유입되지 않고 있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기존 종사자들이 다른 업종으로 전환을 하지 못하고 이 일을 하고 있어 평균연령이 계속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 유구 십승지(十勝地)와 피난민의 정착

유구는 말방울소리와 직조기 소리로 밤낮을 새워 온 동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감록의 십승지지와 운보 김기창 화백 생가터, 맹자목 도적행적, 99칸집 등 역사적인 유적이 많은 곳으로 서민의 기거지 일뿐, 권력자들의 기거지와는 인연이 없는 곳이다.

정감록에 “維麻 兩水之間 萬人可活地 200里內󰡓(유구 양수 지간 200리 이내는 만인이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살상이 따르지 않을 곳을 의미한다.

1945년 해방 이후 이북에서 직조를 짜던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올 때 정감록에서 첫 십승지로 꼽은 유구로 모여 들기 시작했다. 이후 6. 25와 1.4 후퇴 때 먼저 정착한 피난민들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유구에 정착하면서 의류 수요가 급증하여 유구는 인조직물 생산 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 초기에 천을 짰던 수직기

   
▲ 현재 천을 짜는 무북직기

◇직조기의 발달사

- 1940년대 : 수직기로 유구직물의 시발점
8. 15해방과 6. 25를 겪으면서 유구가 변모하기 시작햇다. 정감록의 십승지지 영향으로 이     북의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피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후 이북에서 직물업을 했던 사람이      수족기를 직접 제작하여 직조를 한 것이 유구직물의 시발점이다. 직조업은 인조견 생산부터    시작했다. 지금은 비단, 또는 신소재를 활용한 직조업을 겸용하고 있다.

- 1950년대 : 동력직기, 군부대가 사용하던 발동기를 일부 동력화
1950년 피난민 10여호로 시작하여 1955년에는 100여호로 증가했다. 1958년부터는 피난민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까지 참여하게 되어 1,000여호로 늘어 났고 직조기는 3,000여대에 이    르게 되었다.
- 1970년대 : 최고의 전성기를 맞아 이 당시에 “유구에서 돈자랑 하지마라”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 1980년대 : 1980년대 들어서 나일롱을 비롯한 신소재 섬유의 발달로 유구 색동과 인견은 쇠락기를 맞는다. 특히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주거환경의 변화로 의류산업도 쇠퇴해져    갔다. 1986년 이후  산업화, 자동화에 힘입어 자동화가 시작됐다.

- 1990년 이후 : 자동화시스템으로 대량생산 체제를 갖췄으나 내수 및 수출의 급감으로        직물업체는 어려움을 겪는다. 1970년대 160여 업체였던 직물업체는 65업체 650여명       이 종사자로 줄었다.

2. 유구 직조의 본산지 석남리

-다음 기사는 이걸재 선생님이 ‘공주의 전통마을 8집’에서 ‘유구 직조의 본산지 석남리’로 게재한 원고로 본인의 허락을 얻어 게재한다.-

유구의  직조는 크게 보아 네 번의 변화를 겪었다. 이를 내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기: 족닥기(수직기)의 제작과 공장 설립기

1기는 수직기의 도입이었다. 194년대 유구에는 전통의 직조기계를 조금 개량한 베틀을 이용하여 베를 짜는 가정이 늘어났으며 강원도와 이북 함경도에서 피난처로 찾아온 유구에서 가정에서 사용하는  천 외에 장에 내다 팔 목적으로 천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가사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소규모였다. 그러던 것이 1950년대 초반 베틀을 개량한 수직기로 천을 짜기 시작하면서부터 산업화의 길을 열었다.

불행히도 필자는 금번의 조사에서 유구 직조의 창시자를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하였다. 또한 수직기의 도입 시기에 대해서도 한국전쟁 이전인지 이후인지에 대하여 명확히 밝히는데 실패하였다.

석남리와 유구리, 백교리 인근의 노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수직기를 처음 놓은 사람을 밝히려고 노력하였지만 1952년 1·4후퇴 이후에 수직기 4대를 놓고 직조를 시작하였던 옥준석 씨와  석남리 황금직물의 창업자 김태만 씨의 증언이 가장 구체적인데 이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분들보다 앞서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하는데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또한 한국전쟁 이전인 1945년부터 1950년대까지 직조를 한 사람들이 전통의 베틀로 했는지 수직기로 했는지에 대한 내용도 분명하지 못하다.

현재까지 드러난 석남리 직조의 시작에 관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족닥기인지 개량베틀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녹천리 경계의 석남리에서 가족 외의 공원을 두고 직조를 시작한  사람이 있으며 이는  1948년경으로 추정되나 누구인지 인적사항은 모른다.

② 현재 석남리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 중 최초의 직조공장 설립자는 황금직물의 창업자인 김태만이며 시작 연도는 1952년 가내수공업 형태로 시작하였고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장을 운영하였다.

③ 유구 일원에서 가장 먼저 족닥기를 놓고 직조를 시작한 이북의 피난민은 1952년 1·4후퇴 당시 평안북도 연변군 영변읍 서부동 76번지에서 살다가 피난 내려와 유구읍 백교리 1번지에서 터를 잡고 직조를 시작한 강복현(1915년 생)으로 추정된다.

옥준석 씨가 말하는 수직기 직조는 전통의 방법보다 생산 효율이 매우 높아서 지역에서 생산되는 실만으로 직조할 수 없게 되자 외지에서 실을 사다 짜는 공장이 생겨나면서부터 가족들의 가내 수공업이 기술자와 공녀들을 채용하는 공장으로의 격식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이를 유구 직조의 시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 하였다.

이 시기 즉 수직기 도입 시기에 가장 적극적이던 사람들은 평안북도 연변군에서 이주해온 피난민들이었고 소수의 타 지역 피난민들이 합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모두 수직기를 사용했으며 한반도에서 북한의 풍기와 남한의 대구와 공주가 직조로 유명했으며 남북한의  교류가 끊어진 1950년 이후 대구와 공주가 직조의 본산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수직기는 현대식의 직조기계가 아니다. 당시 사용하였던 수직기는 목수들이 전통의 베틀을 개량하여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던 것인데 직조기계가 현대화되면서 모두 사라지는 바람에 기계를 알지 못하다가 2002년부터 유구직조협회에서 수직기를 찾기 시작하여 직접 사용하던 수직기를 찾아냈다.

그러나 완전하지 못하여 이를 보완하였으나 상부의 염색기구, 즉 자카드 부분은 아직 완전히 재현하지 못한  상태의 기계뿐이다. 이 작업은 유구직물협회 김차정 상무가 열정으로 재현하여 앞으로 유구 직조의 첫 산물이었던 우모직 짜는 것을 체험코너로 이용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족닥기, 쪽닥기로 불린 수직기는 재래식의 베틀을 개량한 형태다. 기계를 도입한 부분이 매우 적은데 반하여 생산량과 질적인 면에서는 매우 큰 변화를 보였는데 중요한 변화로는 바디의 변화로 천을 짜는 폭이 넓어진 점과 서양에서 1800년대 개발되었던 쟈카드 개념이 도입되어 천에 문양을 넣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바디는 나무 바디에서 쇠 바디로 바꾸어 기계의 고장을 줄였으며 바디의 오르내림을 조정하는 틀이 나무 사각으로 바뀌면서 속도와 벌림의 폭이 넓어졌다.

1953년부터 유구의 직조는 활기를 띠게 되고 각처의 장에서 실을 사 나르던 실 장수들이 부산으로 실의 구입처를 통일하고 이태리에서 생산된 실을 유구의 직조공장에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천이 고급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부산에서 실을 사다가 유구의 직조공장에 보급하기 시작한 사람은 옥시청 씨로 지금도 석남리에 거주하고 있어 정확한 증언이 가능했다.

직조와 관련된 상업으로는 생산되기 전의 실과 기계를 보급하는 상인들과 완성된 인조를 거래하는 상인이 있었는데 1956년경부터 이를 겸하여 시행하는 상인들이 생겨나면서 직조 관련 상업도 규모나 거래량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인조가 생산되면서 유구장에는 인조를 사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드는 장사꾼들 때문에 인조장이 서기 시작했다. 1953년경에는 3일·8일에 서는 유구의 5일장에서만 인조를 대량으로 판매하였기 때문에 유구장이 인조장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으며 기계화가 추진된 1950년대 후반부터 장날이 아니라도 인조를 파는 상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중반까지 인조의 거래 가격은 1마에 5원이었다. 당시 황소 성우 한 마리의 가격이 500원에서 600원 사이였으니 결코 싼 값이 아니었다.

당시 직공들의 임금 체계는 도조제와 흡사했다. 공원으로 들어오면 기술을 배울 때까지 한 푼의 임금도 없고 밥만 먹여주며 3개월 후에는 용돈 수준의 임금을 주었다. 대부분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기술을 배워 정식의 품삯을 받았는데 여성의 경우 1개월에 백미 1가마 값 정도였고 남자 기술자로 기계를 고칠 정도가 되면 백미 1.5가마 정도였으며 최고의 기술자들은 백미 2가마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 극도로 가난했던 공주지역에서 장정 상머슴의 1년 새경이 백미 10가마 정도였으니 유구의 직조 기술자가 되는 것은 남녀 구분 없이 선망의 직업이었고 이런 연유에서 유구의 인구는 급속히 늘어났다.

또한 경영자의 입장에서 공원들에게 주는 임금은 매우 비싼 것이라서 가족들이 먼저 기술을 배워 기술자로 일을 하면서 기술이 적어도 할 수 있는 부분만 가족이 아닌 직공을 채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수직기 공원의 기준을 삼기 위해 채록한 내용 중 이성천 씨의 모친 남상례 씨의 가정에서 행한 경우를 살펴보면 10기의 수직기 기계를 가동하기 위해서 씨의 시부모, 남상례 씨 부부, 미혼의 시누이 2명 형제간 5명 등이 모두 직조에 종사하였으며 가족 외 네 댓 명의 보조 공원을 두고 운영하였다.

이렇게 일한 자식들 중 둘째, 셋째, 아들이 결혼하여 분가를 할 경우 수직기를 만들어 소규모 공장을 차려 분가시키기도 했다. 석남2리 이성천 씨가 1956년 분가할 때 수직기 5대로 공장을 차려 분가하였는데 이는 분가로는 큰 규모였고 보통은 2~3대 수준이었다 한다.

제2기 : 동력북직기 직조 시기

유구 직조의 2차 변화는 1950년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현대화된 직조 기계의 도입 시기다.
수직기가 도입되어 자본력을 갖추기 시작한 일부 공장에서 대구에서 현대 기계식의 직조기계를 구입하여 사업의 규모를 키우고 생산량을 배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도입된 기계는 이른바 동력북직기라고 불린  현대 직조기계였다. 이 기계는 대부분 대구에서 구입하여 인조를 짜는 용도로 사용했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동력을 전기로 해결하는 현대 직조기계였다.

전체적인 구조 역시 베틀이나 수직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바디의 폭이 넓어졌으며 그 동안의 직조기계에 공원이 앉아서 짜던 형태가 아니라 실을 보급하여 기계에 설치하면 기계가 짜는 것을 살펴보는 형태였다.

이 기계의 이름 중 ‘북직기’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직조기계의 발전은 북이 있느냐 없느냐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현대식의 동력 직조기로 제작되었지만 씨줄이 오가는 형식은 북을 사용했다. 물론 북의 형태는 수직보다 매우 작아지고 가벼워졌지만 북을 사용했던 것이다. 동력북지기 또한 계속 개량되었다.

1956년 이후 개량을 거듭하면서 계속 가동되어 아직도 유구의 일부 직조공장에서는 소수가 생산에 사용되고 있다.

동력북직기의 보급은 유구 직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가내 수공업 수준의 직조 산업을 공업화로 변모 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가족 중심으로 중요한 일을 하고 나머지를 공원으로 채우던 형태의 고용 구조가 기업형으로 변모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공장의 규모였다. 족닥리로 재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직조인들은 기계를 도입하면서 헛청 형태의 공장에서 벗어나 넓고 쾌적한 공장형의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며 유구 일원에서 충원되던 공원들도 점차 확대되어 유구 인근의 타 면은 물론 타 고장에서도 찾아와 취업하는 형태로 변했다.

공주시의 통계에 의하면 1956년부터 1991년까지 7천여 명이었던 유구읍의 인구는 1만6천명을 넘어섰고 공장은 1985년 78개의 공장에 1천1백여 명이던 공장 인력이 공장 수는 11로 줄지만 공장인력은 1천5백 명으로 증가한다. 결국 성업 중인 직조공장들이 수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규모가 성장하는 양호한 형태였다는 것이다.

직조 관련 상업도 변한다. 실을 사다 파는 집과 천을 파는 상점의 단순한 형태가 변하여 실의 보급과 천을 파는 것을 모두 행하는 기업형의 상업인들이 등장하고 늘어나게 된다. 직조공장이 유구를 벗어나 공주 시내로 이주를 시작한 것도 동력북직기가 왕성하게 도입된 시기다. 많은 공장이 이주하지는 않았지만 규모가 큰 직조공장이 공주 시내로 이주하여 터를 잡았다.

또한 인조견 일색이던 생산품이 나일론을 포함하는 변화를 보인 것도 이 시기이다. 나일론이 처음 생산된 시기와 공장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1977년경부터 나일론을 짜기 시작하였고 시장성이 좋아 급속도로 파급되었다.

제3기 : 무북직기의 도입과 섬유 산업의 불황

3기는 무북직기의 도입이었다. 이는 1989년에 시작되어 1992년까지 계속된 변화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아직도 개량된 동력 북직기를 사용하는 직조공장도 있지만 대부분의 직조공장이 무북직기로 바꾸었고 동력북직기를 사용하는  공장에서도 무북직기와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는 정도다.

무북직기와 동력북직기의 가장 큰 차이는 북이 있고 없고의 차이지만 이는 기계를 보는 여성 인력의 감축을 의미한다. 동력북직기 관리는 1인1대 기준이다. 다년간 직조에만 종사한 인력은 1인이 2~3대를 관리할 수 있기도 했지만 이는 극소수였고 대부분이 1인 1~2대 기준이었다.

그런데 무북직기는 5~6대가 가능하였다. 1990년대 인건비가 올라가면서 경영에인건비 부담이 늘어나던 시기라서 무북직기의 확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석남리 직조의 정점은 1992년경으로 보인다. 공장이 80개에 이르고 무북직기로 인건비 부담이 줄어들어 경영수익이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중흥이 유구읍이나 석남리 경제에 부정적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1천6백명에 이르렀던 직조인들이 점차 줄어들면서 경영자들에게는 많은 이익을 창출했으나 인건비 살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값싼 직물류가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직조업 경기는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는1997년 국제구제금융(IMF)의 한파가 불어 왔다.

전국을 휩쓴 경기 불황의 타격은 중소기업으로 운영되던 유구 직조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97년 당년에는 폐업이나 휴업을 한곳이 적어 표면적으로는 큰 타격없이 지나가는 듯했지만 규모가 작은 공장부터 문을 닫기 시작했고 1998년에 이르러는 대구, 진주 등의 직조 관련 도시들의 불황과 맞물려 전체적인 규모에서 45개 직조 회사에 603명의 직조인만 남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는 성황을 누렸던 1992년과 대비하면 기업체 수는 42%가 감소한 것이고 직조 관계자는 63%가 감소한 사항으로 회생의 희망조차 암울했던 시기였다.

제4기 : 현대 직조기 도입. 쟈카드 센터 출범의 부흥기

이른바 IMF파동 이후 2001년까지 유구읍의 직조는 조금은 회복되었지만 새로운 돌파구를 필요로 했던 암울한 시기였다. 인조와 나일론에 의존하였던 생산 품목의 고급화와 다양화가 요구되고 기계의 개선으로 인건비를 줄여야 했으며 새로운 판로를 개척해야 하는 등 복합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필요성으로 새롭게 결성되어 활로를 모색한 것이 유구직물협회다. 유구직물협회는 2002년에 뜻을 같이 하는 사업주들이 모여 준비하기 시작하였고 현재 충청남도직물공업협동조합과 유구직물협회의 상무이사가 상근직으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구체화되어 2003년도에 조합을 설립하였다.

이후 유구자카드생산연구원이 차려져 연구를 시작하면서 생산제품에 대한 고급화 다양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정부의 지원으로 2006년 본격적으로 새로운 제품이 생산되고 기업이 대형화되는 변화를 시작하게 된다.

현대 직조기계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에 있다. 베틀부터 시작하여 무북직기에 이르도록 천을 짜는 일과 염색이 일체화 되어 있어 다양한 문야의 천을 생산해 내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현대는 문양의 디지털화를 통하여 원하는 그림과 원하는 문양을 자유롭게 생산한다. 그리고 모든 공정이 기계식이라서 소수의 종사자들만 필요로 하여 인건비를 대폭 낮추었다.

유구자카드센터에는 2009년 마케팅·홍보관을 개설하여 연구·생산·판매의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조직을 갖추었으며 유구읍 백교리에 새로운 공단을 조성하고 있다.

현재 유구자카드센터에서 추구하는 미래형 고품질 섬유에 대한 노력의 분야는 광범위하다. 총체적인 면에서 무게를 줄이는 초경량섬유, 습기에 강한 무습, 방수섬유 등의 고기능성 섬유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를 분야별로 나누면 ⑴항균성, 소탈취성, 전자파폐쇄성, 자외선 차단기능 등을 종합하여 생체적합성을 높인 위생 건강 기능성 섬유 ⑵투습성과 발수서의 장점을 살린 쾌적, 편리 기능성섬유, ⑶불에 강한 난연성섬유와 전력의 투과를 막는 제전성섬유 등의 안전성 기능 섬유, ⑷감촉이 좋고 미적 아름다움이 뛰어난 촉감 심미 기능성 섬유, ⑸화학적 특성을 살려 활탄소 섬유를 표방하는 분리 기능성 섬유 등 구체적인 개발의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유구 직조를 일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이미 성과를 내기 시작하여 한지의 성분이 더해진 쾌적 섬유 개발에 성공하였고 극세사섬유 생산이 본격화 되었으며 이렇게 생산된 천을 디자인하여 완성 제품을 생산 쟈카드홍보마켓팅센타에서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유구 직물의 흐름 중 앞서 말한 1, 2, 3기는 석남리가 주축이었는데 4기는 백교리로 이동하였다는 점이다.

아직도 직조공자의 수는 석남리에 더 많은 양이 생산 활동을 하고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모해서 직조와 염색을 분리하는 현대 직조기계 설비는 백교리의 공장들이 앞서가고 있으며 새롭게 조성하는 유구직물단지가 백교리에 건설되고 있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유구 직조는 모든 면에서 백교리로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2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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