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평 “일본자기 시조로 빛나는 계룡산 도공”

철화분청이 태어난 학봉리 가마

지난 8월 11일 오후, 반포면 학봉리 79-24번지에서 ‘일본 도조 이삼평 공 추모제’가 열렸다. 공주 이삼평 연구회와 한국도자문화협회가 공동 주관해 매년 개최해온 행사인데, 내년부터는 학봉리 주민들이 주관하기로 했다고 한다.

행사가 열린 소공원에는 한일 합동으로 세운 ‘일본 자기 시조 이삼평 공 기념비’가 우뚝하니 서 있다.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진 연유는 무엇인가.

박정자 삼거리에 이 비가 처음 세워진 것은 1990년 10월, 한국측의 (사)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회와 일본측의 ‘일본도조 이삼평 공 기념비 건설위원회’가 힘을 합쳤다.

도로공사가 예정되어 비가 옮겨진 것은 2016년 가을이다. 한글과 일어로 이삼평의 행적이 새겨져 있는데, 일본 아리타 ‘도조의 언덕’에 있는 비문과 일맥상통한다.

아리타에는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인 이삼평 공은 조선국(현재의 대한민국) 충청도 금강 출신으로 전해지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출병했을 때 나베시마군에 붙잡혀 길 안내 등의 협력을 명령받은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새겨 있다. 학봉리의 비문에는 “이삼평 공은 조선의 도공으로서 임진, 정유의 왜란에 일본에 건너가게 되어”로 시작된다. 

한마디로, 계룡산의 사기장이었던 이삼평은 왜란 때 일본에 끌려가 자기를 재현하고 산업화한 인물이다, 학봉리·온천리·하신리 등 계룡산 동쪽 산기슭 일대에는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도자기를 제작하던 가마터가 산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산화철로 그림을 그린 철화(鐵化) 분청사기가 만들어졌다. 다른 곳의 작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멋이 있어서 일본 다도계에서는 ‘케류잔(鷄龍山)’이라고 부르는 명품들이 만들어졌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발굴조사(1927년)한 가마터가 학봉리인 것도 그런 까닭이다.

아리타 백자를 만든 계룡산 사기장

‘계룡산 분청’이라 통칭되는 철화분청사기는 전면을 귀얄(넓고 굵은 붓)로 백토 분장하고 짙은 철사(鐵砂) 안료로 그림을 그렸다. 뛰노는 물고기, 활달한 느낌의 모란당초문, 자유분방한 풀잎모양들을 새겨 넣었는데, 원래 형태를 대담하게 생략하고 간결하게 재구성했다.

계룡산 자연이 주는 느낌, 소박한 충청도의 토속 분위기, 이를테면 서민의 감성이 묻어난다. 2014년 8월, 충남의 순교성지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안희정 도지가가 증정했던 어문병(魚紋甁)이 바로 계룡산 분청의 대표 작품을 재현한 것이다.

이삼평은 정유재란(1597) 때 계룡산 부근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일본군에 사로잡혔다. 임진년에 전쟁의 불길을 피했던 공주는 정유년에 일본군에 유린되고 말았다. [선조실록]의 1597년 9월 6일과 20일의 기록에, 공주에서 일본군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계룡산 갑사, 공암 충현서원, 월송동 명탄서원 등이 이때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는 임진, 정유의 조선침략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그들은 도자기를 약탈하는 한편 사기장들을 납치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때까지 자기를 만들지 못하고 도기를 만드는 정도의 기술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15세기부터 센 리큐(千利休)가 주도한 다도가 최상층의 고급문화로 퍼져나가 조선과 중국에서 수입한 다기를 애용했다. 명품 다기 한 점을 영지의 성 하나와 맞바꾸기도 했으니 조선 도공들을 경쟁적으로 납치해간 것이다.

일본에 간 이삼평은 자기 생산에 적합한 흙을 찾아 나베시마의 영지 일대를 돌아다녔다. 마침내 그는 1616년, 아리타의 이즈미야마에서 발견한 양질의 자석광(백토광)을 사용해 일본 최초의 백자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나베시마 번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도자기 산업을 일으켰는데, 자신의 이름을 ‘금강(金ヶ江, 가나가에)’이라고 짓고, 스스로 기록한 행적기에 ‘금강도(金江島) 출신‘이라고 자신의 원뿌리를 명확히 밝혔다.

이삼평이 일구어낸 아리타자기는 1650년대에 세계적 명품이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사들여 유럽대륙에 유통시킨 것이다. 바로 전까지 인기가 있었던 중국 징더전(景德鎭) 도자기가 명-청 교체기의 전란으로 막히자 품질 좋은 아리타 자기로 대체한 것이다. 첫 수출로부터 70년 동안 무려 7백만 점이 팔려나가 아리타자기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이자 일본의 최대 수출품이 되었다.

학봉리 일대를 도자문화의 메카답게

오늘날 아리타에 가면, 유서 깊은 도산 신사에 이삼평을 배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658년에 처음 세운 신사로, 이삼평이 가마를 연 지 300년이 되던 1917년에 나베시마 나오시게 번주와 이삼평을 합사했다고 한다. 신사의 위쪽 ‘도조의 언덕’에 ‘도조 이삼평 비’도 이때 세웠다.

‘도조’라고 이름 붙였을 뿐 아니라 가나가에 삼페이라는 일본이름 대신 이삼평이라는 조선이름을 쓰고 있어 존숭의 뜻을 표시하고 있다.

이 비에는 “이삼평 공은 우리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일 뿐만 아니라 일본 요업계의 대은인”이며, “오늘날에도 도자기 업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이 선인이 남긴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 공적을 높이 받들어 존경하고 있다.”고 새겼다.

아리타에는 이삼평의 묘소와 그의 14대 후손이 운영하는 ‘도조 이삼평 가마’도 있어 자기문화를 애호하고 연구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답사지로 손꼽히고 있다. 매년 4월말 5월초에 아리타에는 도자기시장이 열리고, 5월 4일에는 도조제를 지내는데, 이삼평이 백자를 만들어낸 1616년으로부터 400년을 맞는 2016년에는 400주년 기념제를 크게 열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 사람들이 이삼평 선생을 높이 기리는 데 비추면, 공주에서는 그의 이름 석자와 업적에 대해 잘 아는 이가 드물다. 그 모태가 된 철화분청사기의 메카, 학봉리 가마터 일대를 메카답게 조성하는 일도 아직 갈 길이 멀다.

계룡산에서 시작된 드라마틱한 생애, 고난의 예술혼, 바다를 넘나드는 교류의 상징으로서 이삼평 선생의 진면목을 밝히고 되살려야 한다. 공주시민들과 연구자, 관광업계, 그밖에 뜻있는 이들 모두 힘을 보태면 큰 걸음으로 디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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