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지애(甘棠之愛)

팥배나무도 아낀다는 뜻으로 선정을 펴 은택이 백성들에게 젖어들자 백성들이 그 덕을 기려 그가 앉았던 팥배나무도 아끼고 가꾼다는 일컬음이다.[사기 史記 권 4]

과거 군아(郡衙, 군청)가 있던 곳의 앞길에는 으레 10여개의 비석이 늘어서 있다.

수령(守令)으로서 선정을 폈다고 세워진 송덕비요, 선정비요, 또 백성에게 사랑을 남겼다는 유애비(遺愛碑)이다.

이 비석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백성을 내 몸처럼 아끼고 부역(賦役)을 공평하게 하고 흉년든 해에 녹봉(祿俸)을 내놓아 구호를 했다는 기록들이다.

본래 수령이 부임할 때는 거의가 임금을 뵙고 떠난다. 이 자리에서 선서처럼 읊는 것이 수령칠사(守令七事)이다. 수령이 부임해서 수행해야 할 일곱 가지 의무사항인 것이다.

농업과 잠업(蠶業)을 발전시키고 호구(戶口)를 증식시키고 교육을 진흥시키고 군사사무를 정비하고 조세와 부역을 공평하게 하고 소송을 간결하게 처리하고 사기와 폭력을 종식시킨다는 내용이다.

수령은 지금의 군수에 해당하는 지방관으로서 현감·현령·군수·부사·목사·부윤을 통틀어 일컫는다. 행정에 사법권까지 가진 수령은 쉽사리 재물의 유혹과 권력의 남용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에 도의 관찰사가 감시하고 때론 어사가 암행하여 그 부정을 살피기도 하지만 교묘히 이루어지는 불법은 결국 이에 반기를 든 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백성의 고락(苦樂)이 수령의 적임여부에 매여 있다고 인식한 당국자는 그 인선에 적임을 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8도 3백 60주(州) 인선이 어려우며 개중에는 한 두 사람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 가운데에는 높은 이상을 지니고 수령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일선행정을 익히며 선정을 베풀다가 중앙으로 승진하여 돌아가는 경우, 주민들이 그 남겨 놓은 사랑을 기리고 아쉬워하며 세운 것이 곧 송덕비요, 선정비요, 유애비인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수령의 은근한 종용으로 또는 몇몇 주민의 아첨성 영합(迎合)으로 비가 세워지고 생사당(生祠堂)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정조 때는 수령의 생사당은 물론이요 송덕비를 세우지 못하도록 금하기까지 하였으나 그 후 비는  다시 세워지게 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비석들은 거의가 그 이후 다시 세워진 것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선정을 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기린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한다.

소공석(召公奭)은 주 문왕(周 文王)의 아들이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쓰러뜨리고 소공을 북연(北燕)에 봉하였고 성왕(成王)때 삼공(三公)이 되어 주공(周公)과 더불어 섬(陝)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은 주공이, 그 서쪽은 소공이 나누어 다스렸다.

그 식읍(食邑)인 소(召)와 도백의 백(伯)자를 따서 소백으로 불린 소공이 서쪽을 다스림에 있어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소백이 지방을 순회하며 민사와 형사를 처리하였는데 혹은 팥배나무(甘棠)아래에 머무르거나 쉬거나 하며 백성들을 다스렸다.

이에 사람들은 적재적소에 각각 쓰이었고 생업을 잃는 일이 없었다. 소공이 죽자 백성들은 그 선정을 생각하여 소백이 앉았던 그 팥배나무를 아껴 (甘棠至愛) 감히 베거나 꺾거나 휘어잡지를 못하였다.

그러므로 시경(詩經)의 소남편(召南篇)에 나오는 감당장(甘棠章) 세장의 가사가 지어져 불려 지게 되었는데 그 한 장을 소개하면 ‘무성한 팥배나무를 갈기거나 베지 말라. 소백이 머물렀던 곳이라.’(蔽芾甘棠勿剪敗召伯所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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