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하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공주대 지수걸 교수의 ‘한국의 근대와 공주사람들’이라는 책에서였다.

공주고등학교의 전신인 공주고등보통학교(공주고보)에서 항일 학생운동을 한 인물이다.

필자가 공주고 2학년이던 1982년에 펴낸 ‘공주고등학교 60년사’의 내용과 일치한다.

작년에 필자가 ‘인물로 본 공주 역사이야기’ 책을 낼 때 ‘공주의 항일운동 지도자들’을 쓰면서 이철하를 빼놓을 수 없었다.

최근에 좀 더 상세한 자료를 얻은 덕에 공주사람들이 이분을 꼭 기억했으면 하는 뜻으로 글을 쓴다.

공주고보는 1922년에 설립되었으니 앞으로 5년 후인 2022년이면 100주년을 맞게 된다. 이철하는 공주고보의 초창기인 1924년에 입학해 1927년에 4학년(당시는 6년제)이었다고 한다.

그는 1927년 6월 26일,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일본인 교장이 공개석상에서 조선 사람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아 이것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죄였다.

당시 동아일보에 ‘반성문 보낸 학생을 구타 출학 / 조선 사람을 항상 무시한다는 공주고보 교장의 처사’라는 제목으로 기사까지 났다. 교장은 스스로의 잘못을 시정하기는커녕 이철하의 아버지를 학교로 불러 그 앞에서 그를 심하게 구타하고 곧바로 퇴학시켰다.

이철하의 퇴학은 공주고보 최초의 동맹휴교를 불러왔다. 동급생 50여 명이 결집해 ‘조선 사람을 차별하는 교장 퇴진’ 등 6개 항의 요구를 내걸고, 이철하의 퇴학 1주일 뒤인 7월 2일부터 동맹휴교를 벌였다. 1년 밑인 3학년생 80여 명, 2학년생 90여 명도 맹휴를 결의했다.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계속된 이 사건으로 경찰이 1주일간 조사를 벌이고 무려 14명의 학생들이 퇴학 조치되었다. 주동자의 한 명인 4학년 한흥손은 경찰에 잡혀가 고문 끝에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니 공주고보 개교 이래 최초의 민족운동이요 1929년에 벌어진 공주고보의 대규모 맹휴의 선구역할을 한 것이다.

이철하는 어떤 내용의 편지를 보냈길래 퇴학이라는 극도의 처분을 받게 되었을까? 몇 개월  전인 1926년 12월 25일에 일황 다이쇼(大正)가 죽었다. 후임 쇼와(昭和, 히로히토) 일황의 아버지다.

공주고보에서도 대단히 엄숙한 추도식이 열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학교 측은 학생들에게 검은색 추모 완장을 착용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이철하를 비롯한 조선인 학생들은 조선식 상복을 입고 나왔다. 사실상의 반일 집단시위였다. 주동학생들은 끌려가 무자비한 구타세례를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조선인 학생들에 대해서 학교 측과 일본인 교사들의 차별과 멸시가 노골화되었고 민족의식이 강했던 이철하는 이에 대한 시정을 교장에게 대담하게 요구한 것이다.

이철하는 1909년 공주 주외면 신기리에서 태어났다. 전주이씨 참판공파의 동족마을인 효포에서 살림이 꽤 풍족한 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1894년 늦가을에 있었던 동학농민군의 충청감영 진입을 위한 효포 전투 때 왕촌으로 피난했다 돌아왔을 정도로 역사의 풍파를 겪었다.

이철하는 공주고보에서 퇴학을 당한 후 배재고보를 거쳐 중동고보에 편입해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조사연구부장으로 활동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좌와 순회강연회, 독서회를 개최한 합법단체였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1928년 11월 체포되어 경성 시내 중등학생들의 비밀결사 ‘ㄱ당’ 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죄목으로 동료 13명 중 가장 높은 징역 4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생활을 했다.

1933년 5월 만기 출옥한 그는 청주에서 ‘조선중앙일보’(당시 사장 여운형) 지국을 경영하기도 했으나 혹독했던 수형생활의 후유증으로 1936년 9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옥중에서 폐결핵에 걸려 출옥 직후부터 치료했지만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겨우 27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그의 항일운동 행적은 사회주의계열로 의심받아 민주화 이후인 1993년이 돼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이철하장학회’를 만들어 그의 뜻을 오늘에 이어가기 위한 구상을 하고 있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479번)에 묻혀 있는 그의 묘비에는 뜨겁고 옹골찬 삶을 응축한 싯귀가 새겨져 있다.

누구를 위한 배움이었던가 / 청년의 슬기여.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외치던
저 용맹했던 가슴 / 청년의 순전한 넋이여.
그대의 뜻 우리들 가슴에 메아리 되어
산 넘어 바다 건너 울려 퍼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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