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충남에서 첫번째 등재된 ‘김이교 유물’(20건 충남 유형문화재 제222호) 가운데 ‘신미통신일록’의 저자 김이교(1764∼1832)는 조선의 마지막 통신사이다. 우리나라 시가문학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는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도 이 목록에 들어있다.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의 저자 퇴석(退石) 김인겸(金仁謙 1707~1772)은 공주 무릉동 출신의 문인학자로 1763년 제11차 조선통신사 486명의 일행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어 11개월간 여행하면서 '일동장유가'라는 저명한 시가(詩歌)를 남겨 한국 시가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김인겸의 일동장유가비는 국문학자들의 모금과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와 안동김씨대전종회가 그의 문학사 업적을 기리기위해 1989년 공주 금강변에 세워졌다.

김인겸이 일동장유가의 저자라고는 잘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고구마를 들여와 빈민구제하는데 공헌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중남미가 원산인 고구마는 유럽을 거쳐 1594년 필리핀에서 남중국으로, 그리고 10년 뒤 류큐왕국(현 오키나와)으로 들어왔다. 당시 사츠마 침공으로 식량난에 허덕인 오키나와는 자연재해에 강한 고구마를 보급함으로서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들어 온 것은 1764년 조선통신사 조엄 일행이 쓰시마(對馬島)에 도착했을 때 종사관으로 함께 간 김인겸이 고구마를 보고 조국의 굶주린 백성들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으로 가져 온 것이다.

김인겸은 한글로 쓴 ‘일동장유가’에서 “이 씨를 얻어다가 우리나라 심어두고 가난한 백성들을 흉년에 먹게 하면 진실로 좋건마는”이라고 씌여 있어 백성을 생각하는 그의 애민(愛民)정신을 알 수 있다.

식량난이 어디 일본뿐이랴? 고구마는 우리나라 6,26전쟁 후 절대적 빈곤을 퇴치시켜준 고마운 식량이었다. 지금도 장년층 세대들은 어릴적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던 배고프던 시절의 아린 추억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김인겸의 애민정신이 우리나라 국민의 굶주림을 해결한 것이었다.

오는 6·13 지방선거가 50여 일 남았다. 출마자들은 모두 “내가 적임자”라며 얼굴 내밀고 손이 붓도록 악수하러 다니기에 바쁘다. 뒷간 갈 때와 나올 때 다른 정치인을 이제 유권자가 가려서 뽑아야 할 때다. 염불보단 잿밥인 제 밥그릇 챙기느라 시정과 민의(民意)는 뒷전인 선량보다는 고구마를 보고 빈민구제를 먼저 생각하는 김인겸 종사관 같은 정치인을 우리는 원하기 때문이다.

한번의 악수보다 김인겸의 애민정신을 되새겨보아야 할 때다.

※ 이 원고는 4월 도정신문 '생생현장리포트'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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