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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을 넘어 현세로 이어지는 한일 교류의 장(場)
제17회 무령왕 축제를 다녀와서
2018년 06월 19일 (화) 15:34:16 여유경(대전 대덕초 교사) 3777@kknews.co.kr

여는 날, 엄청나게 가깝지만 더 가까워진 나라 일본

2002년 7월, 공주향토문화연구회 주관의 큐슈 답사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때는 옛 백제 사람들이 그러했듯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배편으로 하카다항에 돛을 내렸다.

시원하게 불어오던 바닷바람, 아리타에서 처음으로 조우한 이삼평 도공 유적지, 일본의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하던 요시노가리 역사공원, 특유의 날카로움이 느껴지던 성곽과 신사의 모습…….

교대를 갓 졸업하고 임용을 기다리던 시간, 우연히 참여했던 답사 여행의 기억은 그 후로 열일곱 해가 지나도록 생생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직장 생활로 바쁜 나를 대신하여 꾸준히 무령왕 탄신제 행사와 큐슈 답사에 참여해 온 분은 부모님이셨다. 벌써 여러 해에 걸쳐 행사에 참여하신 이야기를 듣고 있던 터라, 무령왕이 탄생한 가카라시마에서 열리는 탄신제와 몇 해째 교류하고 있다는 공주무령왕꾸제네트워크 모임이 몹시 궁금했다. 올해는 다행히 학습연구년으로 여유가 생겨 어머니와 함께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후쿠오카성 홍로관

첫 방문지는 후쿠오카성 홍로관(鴻臚館/코로칸)이었다. 홍로관은 일본 외교의 관문으로 나라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일종의 영빈관이라고 한다.

나라 시대에는 당이나 신라에서 온 외교 사절이 뱃길로 큐슈에 입국하면 홍로관에 잠시 머물다 중심지인 다자이후(太宰府)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견당사(遣唐使)나 견신라사(遣新羅使), 유학생들이 출항을 기다리며 머물기도 했다는 이곳은 일본 외교와 교역의 장(場)이자 설렘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홍로관 역사박물관(鴻臚館跡展示館)에는 발굴 현장과 복원된 옛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유적 답사 전문가인 공주대 서정석 교수님의 세세한 설명을 들으며 전시물을 둘러보니 깨진 돌조각도, 낡은 목간 조각도 예사롭지 않게 눈에 들어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과연 옳은 말이다. 서서히 높아지는 기온에 해를 잠시 피하고 싶은 마음이 그득하여 답사팀은 걸음을 재촉하며 버스에 올랐다.

   
다자이후 정청 답사

지금은 터만 남은 큐슈(九州)의 중심, 다자이후 정청(大宰府政庁跡) 유적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지도에서 홍로관과 일직선상에 위치하는 다자이후 정청은 드넓은 폐허 위에 초석만이 남아 있었다.

다자이후 정청은 664년 백제 부흥군이 왜와 함께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배한 후, 일본 정부가 설치한 지방 관청이다. 당시 백제 유민이 쌓은 백제식 토성이 정청 인근에 남아 있다고 한다.

푸른 초원에 남은 거대한 주춧돌이 당시 어마어마했을 건물의 규모를 짐작하게 했다. 달콤하게 풍겨오는 하얀 토끼풀 꽃향기를 맡으며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버스는 야메(八女)시로 향했다. ‘별이 내리는 마을’ 호시노촌 차문화관(茶の文化館)에서 후지사게 촌장님을 비롯한 ‘무령왕을 생각하는 모임’ 회원들이 일본식 다도(茶道)로 우리를 반겨주셨다.

널찍한 다다미방에서 곱게 기모노를 차려 입고 내어 주시는 일본식 말차와 화과자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차 한 잔에도 정갈하고 절도 있는 일본이 담겨 있었다.

   
호시노에서의 전통차 체험

   
야메시의 '무령왕을 생각하는 모임'과의 교류

이어 밤늦도록 이어진 무령왕네트워크 교류회는 한일 민간교류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한국 방문단은 곱게 백제 옷을 맞춰 입고 행사에 참석했다.

학회를 마친 윤용혁 교수님 일행도 시간을 맞추어 오셨다. 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 정영일 회장님과 후지사게 촌장님의 인사로 행사를 시작하여 서로 준비한 선물을 나누었다. 2014년부터 이어진 두 모임의 우정은 서툰 한국어와 일본어로 나누는 대화보다 마음이 먼저 닿아 있었다.

여든 여섯이 된 연세에도 빠짐없이 모임에 참석해서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윤동주의 시를 읽는 회원님의 모습은 감동을 넘어선 놀라움이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감사함에 대한 보답으로 미리 준비해 간 쑥떡도 일본에서 인기 만점이었다.

새벽에 계룡 방앗간에서 금방 만들어 일본까지 공수해 간 정성 덕분인지 떡이 여전히 말랑말랑하고 쫄깃했다. 우리 모임의 우정도 그렇게 더 쫀득쫀득해진 느낌이다.

이튿날, 옛 백제의 향기를 맡으며

둘째 날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호시노무라 온천에 몸을 담그며 하루를 열었다. 1인분씩 정갈하게 차려진 일본식 아침상을 받으니 귀하게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마을을 떠나는 우리들을 배웅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호시노 마을 차 회원님들이 나와 계셨다. 버스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며 아쉬워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마음에 대한 보답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에 이 감사함은 가을에 공주 백제문화제에서 다시 전하리라 마음먹었다.

우리는 옛 백제의 그림자를 찾아 구마모토현 기쿠치성(鞠智城)을 찾았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잠시도 쉬지 않고 강의가 진행되었다.

1교시 수업은 공주대 윤용혁 교수님께서 전일 학회에서 발표하신 내용을 말씀해주셨다. 행사를 시작한 첫 해부터 꾸준히 무령왕 관련 내용을 알리고 한일 교류를 의미 있게 만들어주시는 교수님의 노력과 열정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존경의 마음이 일었다.

무령왕을 닮은 교수님의 인자관후(仁慈寬厚)한 모습과 간간이 섞여 있는 우스갯소리에 졸음이 저만치 달아났다.

이어지는 서정석 교수님의 박학다식하고 이해하기 쉬운 설명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덧 기쿠치 성에 다다랐다. 온고창생비(溫故創生碑)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라를 잃은 백제의 귀족을 먼 이국땅에서 동상으로 마주하고 보니 나도 옛 백제의 유민이 된 듯 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어우러진 팔각형의 고루는 비록 복원된 것이지만 고대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전시관에는 한반도의 문화를 소개하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었다. 구마모토현과 자매결연을 맺은 충청남도에서 보낸 낯익은 한국 유물이 반가웠다.

   
기쿠치성 유물전시관에는 충청남도에서 보낸 백제유물(복제품)이 일행을 반겼다

온고창생관에 전시된 유물과 전시 자료를 살펴보니 흥미로운 점이 많았다. 일본 스스로 기쿠지성과 백제와의 관련성을 드러내고 ‘조선식 산성’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라든가, 성을 대표하는 온고창생비에 백제의 귀족을 전면에 드려내고 있는 점, 백제계 청동불상이 일본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 원본을 일어 번역본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우리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부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국과 일본 역사의 엉킨 실타래 한 부분을 겨우 풀어 놓은 기분이랄까. 한국에 돌아가면 학생들에게 꼭 이 이야기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구마모토 현립 장식고분관(熊本県立装飾古墳館)은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Ando Tada)의 설계로 유명하다고 했다.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건물은 일반적으로 네모반듯한 모양새의 박물관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일행들과 전시관을 죽 따라 걷다 보니 갤러리에서 그림을 보듯 자료를 볼 수 있었다.

환하게 건물 내부로 들어오는 자연 채광이 안과 밖의 구분 없이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전시관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분 모형을 전시하여 그 내부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구석기인들의 동굴 벽화 같은 기하학적인 장식 형태가 특이하고 새로웠다. 

   
모녀가 함께 한 답사. (좌 -필자, 우 - 수정식당 김태순 사장. 구마모토 장식고분관에서) 

외벽 계단을 통해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오고서야 나는 이 건물의 진가를 알 수 있었다. 푸르른 고분군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도록 펼쳐진 조망. 고분군과 건축물이 묘하게 어울리는 모습에서 현대적인 미학에 잘 버물어진 고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서정석 교수님 설명에 따르면 구마모토현(熊本県) 내에는 수많은 고분군이 있고, 그 중에서도 장식고분이 186점 발견되었으며, 이는 전체의 38%에 이른다고 한다. 죽은 자의 집조차 형형색색으로 모양내던 그 사람들이 살아 숨 쉬던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나는 몹시 궁금해졌다.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일식당에서 그림처럼 예쁘게 차려진 일본식 정찬이 오늘의 점심이었다. 시마바라 반도로 가는 페리 승선 시간을 맞추기 위해 모두들 일사천리로 그릇을 비워냈다.

음식 맛을 천천히 음미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지만 맛좋은 디저트까지 미리 준비해주신 센스 덕분에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여유 있게 항구에 닿을 수 있었다.

구마모토 페리는 우리가 탄 버스를 통째로 태우고 시마바라 만(灣)을 건너갔다. 오른편으로 김 양식으로 유명하다는 아리아케해(有明海)가 보였다. 멀리 보이던 산이 가까워지자 도착이었다. 구름의 땅, 운젠(雲仙)이었다.

   
맑은 물이 부러운 시마바라 무사양반마을의 수로에서

한가로워 보이는 도심을 지나는가 싶더니 웅장한 성 앞에 정차했다. 1618년 축조된 시마바라(島原) 성은 하얀 건물과 높은 성벽이 조화로웠다. 이곳이 일본 최초 농민 반란으로 기록되는 ‘시마바라의 난(亂)’이 일어난 곳이라는 사실을 한남대 이정신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인이자 전문가로 구성된 ‘걸어 다니는 휴먼라이브러리’ 인력풀이 그득한 답사팀을 따라다니니 눈이 즐겁고, 귀는 더 호강이었다. 굳이 스마트폰으로 찾아보지 않아도, 책을 들추어보지 않고도 하루 사이에 머릿속에 역사 지식이 한 뼘은 더 쌓인 듯 했다.

시마바라 사무라이 양반마을로 걸어가는 길의 한 가운데 소박하게 물길이 흘렀다. 양 옆으로 정원수가 예쁜 일본의 가정집을 구경하는 것은 쏠쏠한 재미였다. 습기를 머금은 촉촉한 공기, 선선한 바람, 고요한 골목길의 풍경을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었다.

골목을 지나며 곳곳에서 카메라 셔터가 눌러졌다. 대문을 개방해놓는 가옥 몇 채에 들러 안채를 들여다보았다. 잘 정돈된 다다미방에 소박하게 남아있는 살림살이가 정겨웠다. 잉어가 노니는 연못과 꽃과 나무가 잘 정돈된 정원을 지나 마을을 한 바퀴 돌아오니 다시 시마바라 성 앞이었다.

   
운젠 지옥의 유황 냄새가 코 끝을 찌르고... 

시마바라 반도의 화산 활동이 낳은 운젠 지옥은 사진으로도 몇 번 본적이 있다. 부글거리는 온천 사이로 하얀 수증기가 구름처럼 솟아오르는 모습. 실제로 가까이 다가니 비릿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땅 속에서 지표를 향해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통해 살아 있는 지구를 느꼈다. 온천수와 맞닿은 부분은 모두 새카맸다. 온천수는 수도관을 통해 마을의 온천장(溫泉場)으로 흘러갔다. 100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물의 힘과 유황의 독성에 곳곳이 변색되어 있었다.

학생들에게 보여줄 동영상 자료를 촬영하며 발걸음을 재촉하자 유황 계란을 삶아 파는 휴게소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다함께 빙 둘러 앉아 따끈따끈한 계란을 소금에 찍어 먹었다. 계란에서 비릿한 유황 냄새가 났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맛좋은 음식을 누구와 함께 먹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아무리 천하의 진미라도 나 홀로라면 그 맛이 온전히 느껴질 리 없으므로. 계란 하나도 함께 나누어 먹으니 지옥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곳이 곧 천국이었다. 우리는 우레시노 온천 지구에 짐을 풀고 하루의 긴 여정을 마무리했다.

셋째 날, 도자기와 함께 한 하루

호시노 온천마을에서 고즈넉한 자연 속의 여유로움을 느꼈다면, 일본 3대 온천 관광지로 유명한 우레시노는 미끌미끌한 온천수가 일품이었다. 삼일 째 수질 좋은 온천에서 호강을 하니 우리 일행 모두 피부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여행지에서 누리는 작은 사치였다. 우리는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도자기와 이삼평(李參平)의 고장, 사가현의 아리타로 향했다. 답사팀의 공식 일정을 시작하는 중요한 날임을 윤용혁 교수님께서 일러주셨다.

   
이삼평 공이 도자기를 굽던 가마, 덴구다니 가마터

계룡산 아래에 살던 나이 열여덟의 어린 도공 이삼평이 전란에 휩쓸려 길잡이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 간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다. 같은 처지였던 도공이 이삼평公 혼자만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도공으로서 자신의 길을 완성한 그를 일본인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삼평 공이 도자기를 굽던 텐구다니 가마터에서 만난 ‘일본 자기 발상(發祥)–도공 이삼평공의 생애’의 저자 구로카미 슈텐도(黑髮酒呑童)도 그중 하나다. 해박함과 성실함이 느껴지는 작가님의 설명을 들으며 이삼평公과 도자기에 대한 그의 특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삼평 공의 도자상을 모신 도잔신사에서 서정석 교수의 설명을 듣는 일행

   
이삼평 묘를 찾아 술잔을 올리는 정영일 회장과 일행 

세라믹로드가 시작된 이즈미야마 자석장을 살펴보고, 도조 이삼평을 신으로 모시는 도잔신사(陶山神社)를 찾았다. 하얀 도자기로 남은 이삼평 상의 모습을 뵈니 마음이 뭉클했다. 그가 생전에 살던 집터를 지나 우리는 이삼평공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정영일 회장님이 일행을 대표하여 헌작하였다.

윤 교수님이 공주 학봉리 도예촌에서 이삼평 公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계룡산 자기와 한국 술을 여행 트렁크에 보물처럼 고이 넣어 가져오셨다.

컴컴한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먼 이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했을 公의 마음을 생각하며 우리는 소리 높여 ‘고향의 봄’을 함께 불렀다. 우리들의 정성은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분명 이삼평 公과 맞닿았으리라.

이번 여정에서는 특별히 아리타 시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열일곱 해 동안 답사팀이 아리타를 방문하면서 단 한 번도 행정기관을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역시 윤용혁 교수님께서 몇 달 전부터 시청 관계자와 접촉하여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아리타 시청에서 우리를 초청하여 교류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교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빈 땅을 다져 거름을 뿌리고, 씨앗을 심어 새싹이 틔워 성장시키기까지 길고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운이 좋게 꽃이 피는 현장에 있었을 뿐이지만, 그 짧은 순간을 위해 자신의 귀한 시간과 마음을 보탠 여러 어르신들의 노고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공주 사람이라면 그 분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리타시를 방문,  요시야키 정장과 간담회를 가졌다

도자기의 고장답게 간담회장은 여러 종류의 도자기를 전시하고 있었다. 들풀을 보기 좋게 꽂아 솜씨 있게 장식된 테이블에는 예쁜 테이블보가 깔려 있었다. 아리타에서 생산된 도자기에 담긴 커피와 케이크 등의 다과를 한 사람씩 대접받으니 준비한 분들의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리타 시 요시야키 정장님께 정영일 회장님이 미리 준비한 공주 분청사기를 선물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교류를 약속하며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시청을 나섰다.

   
아리타 현립 도자미술전시관 전경

사가현립 도자미술관에는 일본 도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한 공간에 담겨 있었다. 입구의 손잡이부터 전등 스위치, 화장실 세면대의 물 내려가는 곳의 장식품까지 각기 다른 모양의 도기 제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심미안 있는 일본인들의 섬세한 미의식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구로카미 작가님이 우리 일행과 함께 하며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도자기 색깔이며, 도자기 생성 과정 등을 세세히 설명해주셨다. 이해하기 쉽게 통역해주시는 나정희 선생님의 센스에 다소 어려운 내용도 쉽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 옛날 싼 가격에 유럽으로 대량 수출했던 아리타도자기를 비싼 현재 가격으로 다시 사들여 전시해놓은 공간을 둘러보며 국력(國力)은 곧 경제력(經濟力)임을 깨달았다.

다만 자신들의 옛 흔적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들의 마음 씀이 한국에도 미처 일제강점기 강탈하듯 앗아간 우리 문화재들도 제 자리에 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일었다.

우리나라도 더 국력을 키워 우리 돈으로라도 우리의 문화재를 꼭 되찾아 왔으면 싶었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는데 조금은 부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아리타포세린파크로 이동하여 우리는 사가현의 소고기를 곁들인 정찬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독일의 츠빙거 궁전을 본 따 지었다는 포세린파크는 훌륭한 포토존이었다. 파란 하늘에 펼쳐진 노란 들풀, 그 사이로 웅장하게 서 있는 궁전의 모습이 마치 유럽에 와 있는 듯 이국적이었다.

궁전 앞에 놓인 분수까지 똑같이 만들어 놓은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역시 일본은 모방하여 자신의 것을 만드는 것에 놀라운 재주가 있다. 궁전의 건물 안에서는 도자기 전시가 있었는데 도자문화관을 지나온 터라 아쉬움 없이 지나쳤다.

아리타에서 가라츠로 이동하는 동안 버스에서 여러 회원님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 당진교육장 지희순 선생님은 20년간 갈고 닦은 차(茶)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기꺼이 나눠주셨다. 선생님의 곧고 고운 자태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공주 중동성당 한동성 주임 신부님이 들려주신 사제 생활 이야기를 들으니 낯설고 새로우면서도 먹먹한 감동이 일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은 과연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정영일 회장님의 공주고 동창 모임에서 오신 여러 어르신들의 재치 있는 입담에 버스 안은 순간순간 웃음꽃이 번져 났다.

   
가라츠시를 방문, 직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일행을 반기는 모습

   
가라츠시를 방문, 정영일 회장이 미네 다츠로우 시장에게 백제문화제 팜플렛을 건네고 있다

가라츠 시청에 방문을 약속한 시간은 오후 세 시였다. 길을 돌아가느라 세 시를 조금 넘긴 시각 가라츠 시청에 도착하자 우리 일행은 벅찬 감동에 일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시청 입구에서부터 두 줄로 도열해 한국과 일본의 깃발을 흔들며 우리를 맞이하는 환영 인파에 너무 놀랐던 것이다.

날이 더웠고, 오후의 햇볕은 뜨거웠다. 벌써 한참동안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렸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회원님도 계셨다. 오전에 아리타 시청에서도 따뜻한 대접으로 마음이 훈훈해졌던 우리 일행은 가라츠에서 다시  한번 울컥한 뜨거움을 느꼈다. 감동이란 사람 마음을 흔드는 것, 그것은 오롯이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시청의 복도를 가로질러 이동하는 동안에도 시청 직원들이 미소와 웃음으로 환대해주었다. 평소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는지 잘 몰라 지나치게 진지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나 자신을 그 짧은 시간동안 되돌아보았다. 웃음은 만인공통의 언어요, 가장 솔직한 환영의 몸짓이라는 것을 배웠다.

실상 그것이 예의상 짓는 웃음이래도, 참 좋았다. 나도 앞으로는 누군가를 그렇게 맞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격한 환영의 터널을 지나 우리는 미네 다츠로우 가라츠 시장님을 비롯한 일본 가라츠시 인사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가라츠는 우리 식으로 읽으면 당진(唐津)이다. ‘당나라로 가는 나루터’라는 뜻이다. 한국의 당진과 일본의 가라츠, 공교롭게도 두 도시의 전 교육장님이 나란히 함께하여 반갑게 인사하였다.

가라츠시는 몇 해 전 어머니께 공주시청 관계자 분들과 음식 축제에 참가하여 500인분의 떡국을 팔았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셔서 익숙한 도시다. 공주시 뿐 아니라 울산 및 여수시와도 결연을 맺어 두 도시의 공무원이 파견을 나와 있었다. 낯선 일본어 사이에 들려오는 한국말이 반가웠다.

   
가라츠 군치축제 전시관에 전시된 대형 가마(히키야마, 曳山)

이 분들의 안내로 우리는 군치 축제 자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라츠의 유명한 무형문화제인 군치 축제 행사에 쓰이는 14대의 대형 가마(히키야마, 曳山)를 보관하는 장소이지만, 평소에는 일반인이 관람하도록 전시를 해둔다고 했다.

무시무시하면서도 기이하기도 하고, 친숙한 형상의 가마는 화려하고 웅장했다. 실제 축제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며 축제의 규모와 행렬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축제의 나라이자 신의 나라인 일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가가미야마 신사와 전망대에 들렀다. 내려다보이는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소나무 방풍림 나즈노 마츠바라가 참으로 절경이었다.

소나무 숲 안에 위치한 해안가의 한적한 숙소에서 마츠로·백제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 주관으로 환송회를 겸한 교류 행사가 열렸다. 가라츠 시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무령왕국제네트워크 회원 분들을 다시 뵐 수 있어 반가웠다. 행사에 앞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가카라시마 회원의 명복을 빌며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내빈들과 참가자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 분 한분 소개했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푸른 백제 옷을 입은 우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였다. 일본어 진행을 맡은 유카 상이 분홍색 백제 옷을 입은 모습이 참 곱고 예뻤다.

   
마츠로·백제무령왕네트워크협의회가 주최한 환영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정영일 회장

   
미야자키 회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는 금강뉴스 신용희 대표

참가자 소개를 마치고 마츠로·백제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의 미야자키 회장님은 그동안 양국 교류를 위해 헌신한 신용희 금강뉴스 대표님께 감사장을 전달했다. 첫 행사 때부터 답사를 주관하고, 공주와 일본 양국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행사에 모두 참석하여 묵묵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신용희 대표님의 뒷모습을 나는 오랫동안 보아왔다.

이제는 어깨에 멘 카메라가 더 크고 무거워 보여 안쓰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인정하는 신 대표님의 깊은 공주 사랑과 헌신의 마음에 어머니와 나는 진심으로 큰 박수를 보냈다.

여행 기간 내내 우리의 우뇌를 활성화하며 온몸으로 노래를 가르쳐 주신 공주의 보물, 나정희 선생님은 통역과 진행을 맡아 행사장의 이곳저곳을 종횡무진하며 우리를 이끌었다.

공주와 무령왕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 우리의 교류 활동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열정, 일본과 한국의 관중을 모두 사로잡는 대단한 자신감과 여유로움이 배어나오는 그녀의 언어와 매너는 우리 모두를 매료시켰다.

대통령 앞에서 통역을 해도 될 만큼의 일본어 실력은 앞으로 공주 지역에 일본어 학습 붐을 일으킬 것 같다. 우리 일행은 모두 나 선생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거인이다.

   
무령왕의 후손인 노다 가수와 지기현의 괭과리 공연

   
와즈마 가수와 '무령왕의 탄생일에'를 부르는 희자매(좌로부터 신용희, 나정희, 와즈마, 지희순)

내 앞 좌석에 앉았던 일본 가수 노다 씨는 무령왕의 후손이라 했다. 부리부리하게 큰 눈과 넉넉한 웃음에서 나는 무령왕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통기타를 치며 시원하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꽤 매력적이었다.

한국과 일본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조선통신사’를 부를 때에는 공주 연정원의 지기현 회원님이 즉석에서 꽹과리 반주를 보태 더 흥이 났다.

일본 가수 와지마 씨와 공주의 대표 꾀꼬리 희자매(지희순, 나정희, 신용희) 트리오가 ‘무령왕 탄신날에’라는 곡을 함께 부르자 한국과 일본의 회원들 모두 몸짓을 함께하며 환호하였다.

버스 안에서 틈틈이 연습한 무령왕의 노래 ‘왕의 섬 니리무세마’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개사한 ‘돌아와요 쿠다라(백제, 百濟)에’를 나정희 선생님의 지휘로 모두 함께 불렀다. 우리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하나 된 백제인이었다. 
  
마지막 날, 오비야 동굴에서 무령왕의 숨결을 느끼며

지난 밤 며칠을 고대했던 큰 행사를 마쳐서인지 아침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 정갈한 일본식 아침식사도 마지막이다 싶으니 더 맛있었다. 보들보들하고 부드러운 일본식 계란찜, 자완무시와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매실 초절임, 우매보시는 한국에 가서도 계속 생각날 것 같다.

어머니는 일본식 청국장 낫또를 내가 남긴 몫까지 깨끗이 챙겨 드셨다. 늘 부지런하게 시간을 지키시는 회원님들과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르고 내릴 때마다 한 사람, 한사람에게 친절한 인사를 잊지 않으시는 버스기사 아저씨께 짧은 일본어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쌓았던 나고야성터의 지도와 현해탄. 바다 가운데 섬이 가카라시마이다.

싱그러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히젠 마을의 나고야 성터(名護屋城跡)로 향했다. 일본의 도시 나고야와 이름이 같은 이곳은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쌓은 성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이 지역 다이묘들은 불과 5개월 만에 거대한 규모의 성을 쌓았다고 한다. 전국에서 모인 다이묘들은 마을 주변에 진영을 만들어 군을 주둔시켰다. 그 후의 이야기는 우리들이 모두 다 알고 있는 왜란의 슬픈 역사다.

아름답고 고요한 이곳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먼 바다를 바라보며 조선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고 화가 났다. 도둑이 들 때는 개도 짖지 않는다더니. 부산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00Km 남짓한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조선 조정에서는 왜 몰랐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우리는 지난 간 역사를 기억하고, 그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현재의 우리를 돌아봐야한다. 그것은 오롯이 미래를 짊어질 우리 아이들의 몫이다. 학교로 돌아가면 되풀이되는 역사의 참모습을 제대로 전하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천수대로 올라가는 길은 길목마다 아름다웠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촘촘한 성벽. 정상에 오르자 현해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은 분명 서로 다른 꿈을 꾸었을 게다. 오랜 시간 그 곳을 지킨 그 나무는 알고 있었을까.

한 길을 들여다보기 힘든 사람의 마음을 말이다. 높은 곳에 이르자 마쓰시마(松島)와 가베시마(加部島) 사이로 무령왕의 탄생지, 가카라시마(加唐島)가 보였다.

윤용혁 교수님의 말씀처럼 옛 백제인들은 이 섬의 반대편에서 일본을 향해 항해했을 것이다. 반대편 일본에서 우리는 1500년 전 선조들이 거슬러온 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두 차례의 전란이 끝나고 일본을 통일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는 조선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싶어 했고, 전쟁 이미지를 씻기 위해 이 성을 스스로 허물고 폐허로 남겼다. 그래서 이 성은 성터만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 전후 과정의 기록이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에 남아 있었다.

지난 밤 환송회에서 뵈었던 나고야성 박물관장님이 직접 박물관 안내 영상을 한국어로 보여주셔서 유물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일 방문한 가가미야마 신사에 원본이 있었다는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의 복사본을 실제 크기로 본 것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같은 역사를 일본의 입장에서 어떻게 기술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였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 편에서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 문화를 무시한다”고 지적하며 “이제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만천하에 드러내 한일 양국이 공유할 때가 되었다”고 했다.

날카로운 지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느 편에서 쓰여야 가장 정직한 역사일까.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지의 문제만큼 어려운 현재 진행형의 과제다.

이제 이번 답사에서 내가 가장 고대하던 그 순간, 무령왕의 섬, 가카라시마로 떠날 시간이다. 오징어로 유명한 요부코 항에서 가카라시마로 가는 배를 기다리며 동네를 잠시 둘러보았다. 요부코 마을은 내일 있을 줄다리기 축제 준비로 한창이었다.

둘레가 양손을 모아 한 뼘은 되어 보임직한 줄다리기 줄을 준비하기 위해 마을 청년들이 모두 나와 우동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신기한 듯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며 사진을 찍어주는 청년이 참 친절했다. 아이들의 축제는 오늘이라고 했다.

전통 의상을 입고 선생님을 따라 걷는 유치원생 꼬마들의 모습이 참 귀여웠다. 출출해진 배를 요부코의 마른 오징어로 달래며 섬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아침부터 화창한 날씨가 무령왕의 축제를 진행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원래 무령왕 탄신제는 무령왕의 탄신일인 6월 초하루를 기준으로 매년 6월 첫째 토요일에 진행되었다.

가카라시마 섬 사람들과 서울과 일본에서 함께 모이는 곤지왕국제네트워크 회원들, 공주무령왕네트워크협의회에 속하는 우리 일행이 모두 모여 꽤 성대한 축제를 벌여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며칠 전, 가카라시마에서 갑작스레 일어난 인사 사고로 인하여 섬에서 진행하는 탄신제는 취소되었다. 대신 우리 일행의 한일 교류 활동과 조촐한 참배 의식으로 나름의 예를 갖추기로 한 것이다.

   
곤지왕네트워크와 주민들이 일행을 반기는 모습

가카라시마로 향하는 작은 배에는 우리 뿐 아니라 마츠로·백제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와 곤지국제네트워크 회원까지 함께 했다. 일 년에 딱 한 번, 모처럼 작은 섬이 북적이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무령왕을 만나러 가는 길, 연애 시절 애인을 만나러 가는 듯 설레었다. 배 안에서 함께 부를 왕의 노래 ‘니리무세마’를 조용히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어머니는 이미 여러 번 섬을 방문하셔서 고향집을 가는 듯 친숙한 모습이었다. 짧은 바닷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즈음 멀리 섬에 먼저 도착해서 플랜카드를 들고 우리를 반기는 곤지국제네트워크 팀의 일원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왕의 섬에 도착했다.

2006년 섬에 세워진 무령왕 기념비가 마을 어귀에서 한 눈에 보였다. 공주대 김정헌 교수님이 설계하셨다는 기념비는 중앙의 아치와 벽돌 무늬가 무령왕릉과 같아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기념비 뒤에 서 있는 현판에는 기념비 건립을 위해 애를 쓴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으로 500만원을 기탁하여 공주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의 초석을 세운 정영일 회장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지성인이시다.

1회부터 지금까지 17년 동안 이 답사 여행을 빠짐없이 참석하신 것만으로도 존경스러운 분이셨다. 많은 이름 틈에 어머니, 아버지의 존함이 보여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나도 의미 있는 일에 돈과 마음을 보태고 살며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어야겠다.

기념비에 다시 내려와 제례를 지낼 것이어서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여 오비야 동굴로 향했다. 크지 않은 섬이라 새로 난 둘레 길을 조금 걸어가니 금방이었다. 동굴로 내려가는 길에 좁은 계곡의 끝으로 작은 우물이 보였다. 그곳에서 탄생한 왕자를 씻겼다 한다.

졸졸졸 샘솟는 우물에는 물이 많지 않았지만, 신생아 한 명을 씻기기에는 충분해보였다. 수자원공사에 근무하시는 이효경 회원님의 전문가적 견해로도 위치상 물이 마르지 않고 수량이 사계절 풍부할 곳이라고 하여 더욱 신빙성이 생겼다.

오비야 동굴의 무령왕 위패 앞에서 우리는 고개 숙여 참배하고 헌작하였다. 우리 일행 29명에 곤지국제네트워크 팀까지 꽤 많은 사람들로 동굴이 북적였다. 다도 팀의 헌공 다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오비야 동굴의 무령왕 위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간 자리에 나와 김미경 작가님 둘이 남아 고요한 파도소리와 적막함이 남은 오비야 동굴과 마주했다. 해안선을 따라 산 속으로 얕게 패인 동굴 안은 습기를 머금어 촉촉했다. 동굴 벽에는 이끼와 작은 덩굴 잎이 자라고 있었다. 이 땅 어딘가에 무령왕의 기운이 남아있지 않을까, 깊은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무령왕이 탄생한 오비야동굴을 찾아 참배하는 일행

우리는 오비야 동굴에서 갓 태어난 무령왕과 곤지 일행이 바라보았을 바다 풍경이 궁금했다. 아기를 낳은 그들은 고향인 백제 땅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바닷길이 잠잠해지면 두 모자(母子)를 선왕과의 약속대로 백제로 돌려보내야 했으니 말이다.

곤지 일행이 일부러 찾은 장소인지, 우연히 닿은 곳이 바로 그 곳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비야 동굴은 무령왕의 탄생지로 완벽한 곳이었다. 작은 동굴은 엄마의 뱃속처럼 포근하고, 적당히 어두웠다.

몇 걸음 밖은 온 세상처럼 환했다. 멀지 않은 곳의 작은 못에서 맑은 물이 샘솟았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목의 작은 섬, 가카라시마(加唐島)는 왕의 탄생지가 되기에 참으로 가당한 섬이었다.

   
정영일 회장이 섬 주민에게 조의금을 전달하는 모습

   
무령왕기념비 앞에서 헌작하는 장면

제례에 늦을까 싶은 마음에 온 길을 빠르게 되짚어 무령왕기념비 앞으로 갔다. 섬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나와 꽤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다. 공주대 역사교육과 문경호 교수님의 진행으로 행사를 시작했다. 전일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사고로 먼저 가신 분의 명복을 빌었다.

정영일 회장님이 공주팀을 대표하여 유족 분들께 조의금을 전달하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이어 무령왕 기념비에 잔을 올리며 그의 탄신을 축하했다. 우리는 ‘니리무세마(왕의 섬)’ 노래를 함께 부르며 1,500년 전 이곳에서 태어나 백제 중흥 인물로 우뚝 선 무령왕을 생각했다.

기념비 앞에 선 사람들이 모두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배에 올랐다. 잠시, 안녕. 하지만 우리는 가을이면 백제문화제가 열리는 공주 땅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공항에 가기 전 후쿠오카시립박물관에 잠시 들렀다.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야 다시 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후쿠오카 공항으로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한 시간만 날아가면 한국이다.

일본에서 한국을 가는 시간보다 두 배 만큼의 시간을 더 자동차로 달려가야 우리 집에 다다르니 일본은 참 가깝고 또 가까운 나라다. 집에 갈 시간이 되자 아이들 생각이 났다.

내년에 중학생이 되는 큰 딸 예현이는 꼭 한 번 참석했으면 싶은 답사였다. 역사의 현장과 옛 백제의 발자취를 직접 보고 느끼며, 교과서 속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배움을 얻을 것이다. 내년을 기약해봐야겠다.

여행은 항상 풍경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난다. 열일곱 해 만에 다시 찾은 큐슈 답사 여행에서 나는 무령왕을 만났고, 옛 백제 유민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었다.

무령왕을 중심으로 현재의 한국과 일본을 잇는 귀한 인연은 온라인을 통해, 일 년에 두 번 공주와 큐슈에서 만남을 이어간다. 이번에 야메시에서 만난 중학생 히노미 양과도 그렇게 인연을 이어갈 것이다. 더하여 이번 여행은 모처럼 어머니와 함께 해 개인적으로도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다.

3박 4일을 함께 하며 정(情)이 듬뿍 들은 우리 일행은 모두 무령왕의 별처럼 빛나는 분들이셨다. 늘 학생들만 데리고 여행하던 내가 일행 중 막내로 어르신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멋지게 나이 들어가시는 어르신들의 모습, 나이와 상관없이 지치지 않는 배움의 열정과 겸손한 삶의 자세를 접할 때면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언젠가 나도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으로 남으리라는 다짐을 하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가까운 거리라서 그런지 외국에 다녀온 것 같지 않았다. ‘왜국’을 다녀온 것이 아니라 큰 나라 백제의 옛 그림자를 따라갔다 왔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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