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희(금강뉴스 대표)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은 많은 유물 가운데서도 삼국시대 무덤의 피장자를 알 수 있는 보물 중의 보물인 국보다. 백제가 신라의 천년 역사에 가려져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다가 무령왕릉이 발굴됨으로써 백제의 진정한 문화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령왕은 공주(公州)를 긴 잠에서 깨워준 백마 탄 왕이었다.
475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쇠락해진 백제였지만 무령왕의 치세로 국력을 다시 일으키게 된다. 무령왕은 양나라 무제에게 보낸 국서를 통해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천명하여 동아시아에 백제의 위상을 높인 백제를 대표하는 왕이었다.

무령왕이 일본 규슈 가카라시마(加唐島)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드라마틱하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당시 백제와 왜(倭)의 활발한 교류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무령왕이 40세에 왕으로 즉위한 후 사람들은 그 섬을 주도(主島) 즉 ‘니리므세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니리므’는 ‘임금’의 백제 언어로 니리므세마는 ‘왕의 섬’이란 뜻이다.
가카라시마에서는 매년 6월 초 무령왕의 탄신일(6월 1일)을 전후한 토요일에 ‘무령왕 탄신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공주에서는 공주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이하 공주네트워크)가 ‘무령왕 탄생제’에 참여하고, 일본 가라츠시에서는 공주를 방문, 백제문화제 4대왕 추모제에 참석하여 무령왕에게 추모의 술잔을 올린다.
가카라시마 현지에는 양국 시민의 성금으로 2006년 6월 ‘무령왕기념비’를 건립, 이곳이 무령왕 탄생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 사가현 야메시에서는 한국어를 배우는 시민들이 ‘무령왕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 공주네트워크와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교류를 해 오고 있다. 이렇게 양국 시민들이 ‘무령왕’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민간교류를 해 온 것이 어느새 17년째가 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풀뿌리 네트워크의 길이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지리상으로 가까운 양국은 같이 가야 할 ‘이웃’이다. 성신교린(誠信交隣)을 바탕으로 한 민간교류가 이루어질 때 정치적 난관도 헤쳐나갈 길이 보이게 된다.

어려울 때 일수록 민간교류의 역할이 더 절실해지는 이유이다.

※ 이 원고는 6월(815호) 도정신문 '생생현장리포트'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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