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길(소설가/공주대명예교수)

얼마 전 정의당 소속 노회찬 국회의원이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척박한 우리 정치 풍토에서 그나마 유머와 품격을 보여 주던 분이었기에 당일은 물론 그 후에도 진보와 보수를 떠나 추모 분위기가 이어졌다.

특히 이 나라에서 정치하는 분들에게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세상을 버린 그 충격에 더 안타깝고 애석해 했는지도 모른다.

수 만 명이 빈소를 찾아 그를 추모한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시의적절한 비유와 해학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상기하고 싶다.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매일 국어사전을 읽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한 우리말 실력으로 그는 우리 사회 곳곳의 갈등과 문제점에 촌철살인의 발언을 쏟아냈다.

답답하고 속상한 세상에 그의 발언은 속 시원한 청량제와도 같았기에 그의 부재와 상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생한 결핍으로 다가올 것 같다.

그의 비보가 워낙 비중이 큰 뉴스였기에 같은 날 오후 신문이나 방송에서 단신으로 처리된 또 한 분의 부음 기사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바로 ‘광장’의 작가 최인훈 선생의 타계 소식이다. 만약 이 정치인의 뉴스가 없었더라면 이 부음 기사는 아마도 특집 편성과 전문가 해설 방송 등 당연히 꽤 큰 비중으로 다루어졌을 게 틀림없다.

‘광장’은 1960년 4월 혁명 후 한 잡지에 전재로 발표된 장편소설이다. 당시만 해도 월간 잡지에 장편소설이 전재되는 것은 매우 희귀한 사례였다. 이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이 작품은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고, 이에 따라 그 잡지는 유례없이 재판을 찍기도 했다고 한다.

그 다음 해인 1961년에 이 작품은 잡지 발표 당시 불가피하게 빠졌던 상당 분량을 보완하여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그 이후 이 작품은 작가에 의해 열 차례 가까이 수정을 거치면서 한국소설사의 금자탑으로 우뚝 서는 스테디셀러로 ‘살아 있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이 작품의 내용은 간단하다. 서울에 살면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이명준이라는 청년이 북한 방송에 그의 부친이 나왔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가 온갖 곤욕을 치르고, 결국은 이 나라에 살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몰래 출국을 주선하는 사람을 만나 스스로 북한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북한 또한 그가 상상하고 기대했던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실망하고 있던 차에 6.25전쟁이 일어나 그는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남한으로 넘어온다. 낙동강 전투에 참전하여 싸우다 연합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고, 휴전 협정 조인 후 포로 교환 협상 때 남과 북의 끈질긴 회유에도 불구하고 남쪽도 북쪽도 아닌 제3국을 선택한다.

작품의 맨 앞과 결말에 동시에 등장하는 하얀색의 배 타골 호를 타고 제3국으로 향하던 중 그는 배 안에서 실종된다. 배를 따라오던 흰색 갈매기들에게 미안해하던 그였기에 스스로 바다에 투신한 것으로 상징적 처리가 되었다.

아 작품에 대한 연구자들의 평가는 찬반양론이 있으나 대체로 한국 분단의 문제를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객관적 입장에서 다룬 작품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사실 분단 이후 남한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다룬 문학이, 북한에서는 미일 제국주의자와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작품이 대세였고, 상대방을 우호적으로 다루는 것은 범죄 행위로 취급되었다. 그렇게 70년 가까이 분단 체제는 지속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작품의 존재는 기적적적이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의 서문에서 말했듯이 ‘亞細亞的 專制의 倚子를 타고 앉아서 民衆에겐 西歐的 自由의 風聞만 들려줄 뿐 그 自由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舊政權下에서라면 이러한 素材가 아무리 口味에 당기더라도 敢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四月이 가져온 새 共和國에 사는 作家의 보람’을 느끼지 못했었을 것이다.

바로 다음 해 정치군인들에 의한 쿠테타가 일어나 군정이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4월 혁명 후 잠시 존재했던 제2공화국이야말로 이 작품이 존재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라 할 것이다.

진정한 분단 문학의 출발이자 동시에 그 안에 분단 종식의 고민을 함께 담고 있는 이 작품을 내가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문학회 회원으로 소설 창작을 공부하던 나는 이 작품을 우연히 헌 책 방에서 구해 읽은 후,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이 작가를 내 창작의 스승으로 사숙하면서 살아왔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삼가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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