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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뭇거리다 때 놓치기 십상이다
2018년 09월 28일 (금) 15:32:23 홍혁기 3777@kknews.co.kr

   

최고납후(摧枯拉朽)

마르고 썩은 가지를 꺾는다는 뜻으로 손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을 일컬음이다.[진서 晉書 권 70]

진(晉)나라 때 사람 감탁(甘卓)은 단양(丹楊)출신이다.

수재(秀才)로 추천되어 오왕(吳王)의 상시(常侍)가 되었고 석빙(石冰)의 토벌에 공이 있어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동해왕 월(東海王 越)의 참군(參軍)이 되었다가 이호령(離狐令)으로 나갔다.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내다본 감탁은 벼슬을 버리고 역양(歷陽)에 갔다가 역신(逆臣) 진민(陳敏)을 만났다.

진민은 크게 반겼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보자며 감탁의 딸을 진경(陳景)과 연을 맺어주기도 하였다.

이때 주기(周玘)가 의거(義擧)를 하고 전광(錢廣)을 보내 진민의 아우 진창(陳昶)을 공격하였다. 이에 진민은 감탁을 보내 전광을 물리치라 하니 감탁은 병사를 이끌고 주작교(朱雀橋) 남쪽에 주둔한다. 진창이 전광에게 살해되자 주기는 단양태수(丹楊太守) 고영(顧榮)과 더불어 감탁을 설득했다.

감탁은 평소 고영을 존경하였고 또 전민의 아우 진창이 살해된데 책임을 묻지나 않을까하는 우려에 고영의 권고를 따르기로 하였다. 감탁은 전민의 며느리가 된 딸을 은밀히 불러내 데려오고 주작교를 끊고 전선(戰船)을 남쪽 강 언덕으로 집결시키고 고영 등과 더불어 진민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317~322년(원제 때) 감탁은 양위장군(揚威將軍) 역양내사(歷陽內史)가 되어 주복(周馥)을 토벌하고 두도(杜弢)를 정벌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워 남향후(南鄕侯)에 봉해지고 예장태수(豫章太守)에 임명되었다. 이어 상주자사(湘州刺史), 양주자사(梁州刺史)가 되어 면수(沔水) 이북의 모든 병사를 거느리고 양양(襄陽)을 지켰다.

감탁은 외유내강하고 간결하고 혜택이 있는 정사를 폈으며 편안하게 어루만지기를 잘하였다. 조세를 줄여주고 시장에 두 가지 값이 없도록 하였다. 수산물에 세금을 부과하되 재리(財利)를 취하지 않고 빈민에게 나누어 주므로 은혜로운 정사라 일컬었다.

왕돈(王敦)이 반기를 들게 되자 감탁에게 사람을 보내 고하였다. 감탁은 겉으로는 응하는 체 하였으니 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았다. 왕돈이 배를 타게 되자 감탁은 나아가지 아니하고 손쌍(孫雙)에게 무창(武昌)의 왕돈에게 가서 중지토록 권하라 하였다. 왕돈은 손쌍의 말을 듣고 놀라워하며 “일이 잘 이루어지면 장군을 공작(公爵)에 임명하겠다.”고 하였다. 손쌍이 돌아와 고하니 감탁은 거취의 선택을 선뜻 내리지 못하였다.

옆의 사람이 “왕돈에게 거짓 허락하였으니 왕돈이 도성으로 들어오면 그때 토벌하여도 늦지 않습니다.”하고 권하자 감탁이 “지난날 진민의 난에 진창이 죽은 것을 두려워해서 토벌했다는 뒷말이 있소. 내본 뜻은 그렇지 않았는데 결과가 그리되어 부끄럽게 여기고 있소. 지금 다시 그와 같은 일을 하다면 누가 나를 위해 변명해 주겠소.”

상주자사 초왕 승(譙王 承)이 감탁에게 등건(鄧騫)을 보내 “지금 왕돈이 난신(亂臣)을 토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은 여망을 저버리고 있소. 충신의사가 일어설 시기이니 이 기회를 잃지 마시오.” 하자 감탁이 “국난(國難)에 마음과 힘을 다하려함은 나의 마음이요, 깊이 생각해 보겠소.”

등건이 이어 감탁에게 “지금 의거도 않고 또 왕돈이 격문(檄文)에도 따르지 않으면 화가 닥칠 것은 필연입니다. 장군이 왕돈보다 많은 병력을 거느렸고 명성 또한 널리 알려졌습니다. 많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명성을 바탕으로 삼아 충과 의를 앞세우면 저항할 자가 없습니다. 장군이 무창을 점령하기란 마르고 썩은 가지를 부러뜨리는(摧枯拉朽)것과 같은데 무엇을 우려하십니까? 무창이 평정되면 이곳의 군수물자로 두 고을을 안정시키고 사졸을 어루만지면 왕돈은 싸우지 않고도 무너질 것입니다.”

이때 왕돈은 감탁이 오지 않자 악도융(樂道融)을 보내 같이 가자고 요구하였다. 악도융은 본래 왕돈을 좋아하지 않았다. 도리어 감탁에게 왕돈을 습격하자고 권하였다. 감탁이 악도융의 말을 듣고 뜻을 굳히고 파동감군(巴東監軍) 유순(柳純), 남평태수(南平太守) 하후승(夏候承), 의도태수(宜都太守) 담해(譚該) 등 10여 인과 사방에 격문을 보내고 더불어 왕돈의 토벌에 나섰다.

그런데 감탁은 비록 의거에 나서긴 하였으니 성격이 굳세지 못했고 또 늙고 의심이 많아 저구(豬口)에서 머뭇거리며 진격을 하지 않았다.

이때 정부군이 싸움에서 불리했고 주의(周顗) 대약사(戴若思)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탁은 눈물을 흘리며 “내가 무창을 지키고 있어 왕돈이 겁을 먹고 있으므로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진 못할 것이다. 양양에 돌아가 도모할 일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하고 병사를 거두고 돌아갔다가 왕돈의 밀령을 받은 양양태수 주려(周廬)의 습격을 받아 감탁은 결국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출판사 다할미디어 (02)517-9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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