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의자에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진을 보았다. 길거리에 죽 앉아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프리토크라는 푯말이 있다. 프리허그는 종종 들어봤지만 프리토크는 처음이다.

시골마을로 이사하고 집 지을 땅을 보러 다니던 중에 만난 이가 마을을 구경 시켜준다며 차를 몰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남편이 바람 핀 이야기를 한다. 나는 당황했다. ‘왜 이런 얘기를 나에게 하는 거지? 특별한 사이도 아닌데.’ 이제 생각해보니 잘 아는 사람이나 친구에게 말하긴 싫었던 거다. 웅덩이를 파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쳤던 이발사처럼 말을 해야 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번에는 내가 누군가가 되고 깊은 웅덩이가 되기로 했다. 국제적수묵수다방 안식당 간판을 걸고, 사람들이 찾아와 아무 말이나 하면 나는 맞장구도 치고 욕도 하며 그림을 그린다. 사람은 말로 서로 소통한다. 물론 소통수단이 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 한마디에 상처 받고, 더 상처받지 않으려고 입을 닫아 버리기도 한다.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는 그들이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말을 가려서 한다. 괜찮은 척, 좋은 척, 아무일 없는 척, 그리고 가상세계로 들어가 또 다른 나를 만들고 그 뒤에 숨어 또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커뮤니케이션 아트 프로젝트, 이야기 그림 공간을 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쓰고 그린다고 하니 주변에서 걱정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할까요.” “모르는 누군가니까 말을 하죠.” 첫번째 손님이 왔다. “초상화 그려준다고 해서 왔어요.” “초상화 아니고 그냥 이야기 그림인데요” 의아해하고 어색하다. “올 여름은 너무 더워요. 더운데 어떻게 지내세요?” 가볍게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어린시절얘기부터 부모님, 남편, 아이들 얘기, 하고 싶은 것, 걱정 등등, 시작한 말은 끊이질 않는다. 그 말을 내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 놓고 그들은 밝은 표정으로 떠난다. 어떤 이는 조금만 건드리면 울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쑥스러워 하며 말을 못하던 이는 아 이런 느낌이구나 하며 기막혀 한다.

이렇게 이른 네 명을 만났다. 함께 얘기하며 그린 사람도 있고 나중에 그리며 얘기한 것을 기억해서 내 나름대로 쓴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할 얘기가 많았는데 어떻게 쌓아 두고 살았는지 마음이 아리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

“굿모닝” 매일 아침 8시면 국내외 25명의 레지던스 작가들이 안식당을 찾는다. 나는 미리 장을 보고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간단한 아침밥을 준비한다. 토스트와 커피, 과일, 요거트, 삶은 달걀 등을 차려 놓고 그들을 기다린다. 아침밥은 공짜가 아니다. 모든 작가는 식권 그림을 그려야 밥을 먹을 수 있다.

매일 아침 주제를 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유달산, 목포바다, 밥, 기억 등으로 주제는 매일 바뀐다. 가끔 오늘은 공짜라고 하면 작가들은 기뻐한다. 단 한 명도 나의 요구를 거부하거나 토를 달지않고 꼬박꼬박 그림을 그려서 나의 작업에 참여해준 작가들에게 고맙다. 그리고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다. 몇몇 작가들은 자기 나라에 와서 해도 좋겠다며 응원해 줬다. 그림은 밥이 된다.

나의 작업은 사람이 있고 찾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낮에 아무도 말하러 오는 사람이 없을까 하여 동료해설사들과 함께 온 마음 좋은 ㅈ 해설사, 아침식사시간에 부족한 것이 있어서 사러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나타나 차를 태워준 ㅇㅇ 갤러리 사장님, 맛있는 밥과 간식을 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다 해결해주는 ㅇㄱㄹ식당 사장님 부부, 작가들이 작업할 수 있게 장소를 제공해주고 뭐든 도와주려는 ㅅㄱ사장님, 장보러 가면 덤을 주던 ㅅㅂㅇㄹㅂ 사장님, 무언가 해주려고 애쓰던 ㅂㅈ호텔 사장님 부부, 곁에서 살펴준 이승미, 조은영 큐레이터, 설거지를 도맡아 해준 이지연 작가, 맥가이버 가이드 김준현, 박성우 작가, 마지막 날에 밥 먹자고 서울에서 다시 내려온 장현주 작가, 점심 저녁마다 가던 수많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주던 손맛 좋은 귀한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한 달 동안 목포 구도심에 있는 한의원, 청소원, 미장원, 이발소, 옷가게, 커피집, 떡집, 김치집, 수퍼, 곳곳에서 만난 분들 덕분에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수퍼맨, 원더우먼이 늘 지켜주던 골목길, 만나면 늘 반갑게 인사하던 그들이 그립다.

다시 가고 싶은 곳은 멋있고 낭만적인 건물이 있는 거리나 아름다운 자연이나 첨단 시설이 있는 곳이 아니다. 사람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그들이 살고 있다면 나는 그곳에 또 가고 싶다. 원도심이 아무리 깨끗하게 잘 정비된다고 해도 그들이 없다면 갈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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