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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곡을 찌르는 말이 약이 된다
2018년 12월 11일 (화) 14:04:03 홍혁기 3777@kknews.co.kr

   

약석지언(藥石之言)

약과 침 같은 말이란 뜻으로 잘못을 지적하여 고치는데 약과 침처럼 병에 도움이 되게 하는 말이란 뜻이다. 옛날에는 날카로운 돌을 침으로 사용했으므로 석(石)이라 한 것이다. [구당서 舊唐書 권 78]

언론이 막힘없이 이루어져야한다고 강조되어 내려옴은 비단 전제군주 체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근대 독재 권력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옛날 언론을 담당한 대간(臺諫)이라 일컫는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원은 물론이요, 일반 관원도 그 직책을 들어 상소(上疏)할 수 있었다.

권력기관은 그 언론이 옳다고 여기면 즉각 받아들여 시정하거나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고 말이 사리에 맞지 않을 경우 불문에 부치고 제재하는 일이 없어야만 언로가 크게 열린다는 주장이었다.

대체로 언론은 독재로 빚어지는 과오나 생각이 미치지 못한 점을 지적하여 시정하고 계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반인도 허물의 지적에 유쾌히 여기지 않는 일이 있는데 더구나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가 과오의 지적을 받았을 때 건방지다, 괘심하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화를 내어 화단(禍端)을 빚는 일이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흔히 보아왔다.

그 잘못의 지적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면 국익에 도움이 되고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우선 불쾌한 감정이 앞서 이성을 마비시키고 화풀이를 하다 보니 종국에는 패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옛말에 임금이 총명하면 신하가 정직해진다고 했다. 배구(裵矩)는 수(隨)나라에는 아첨을 했으나 당(唐)나라에는 충성을 했으니 그 천성이 변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임금이 과오의 지적을 싫어하면 충성이 변하여 아첨을 하게 되고 임금이 바른 말을 즐겨 들으려 하면 아첨이 변하면 충성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임금은 표면이요, 신하는 그림자에 비유한다. 표면이 움직이면 그림자가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당 태종(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은 비록 고구려를 공략하려다가 양만춘(楊萬春)에게 패하여 한쪽 눈을 잃고 돌아간 치욕이 있긴 했지만 영명한 군주라 일컫는다.

많은 전투를 치르고 천하를 거머쥐었고 난리를 평정하고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저성을 쏟아 다스리므로 몸소 정관지치(貞觀之治)란 치세(治世)를 이루었다. 형법은 제정했으나 이를 범하는 사람이 없어 집행하지 안았으니 역시 세상에 드문 현명한 임금이라 한다.

그러나 임금의 덕을 논하면 흠이 없지 않았으니 형제의 난이 그것이다. 전 동궁의 세마(洗馬)였던 위징(魏徵)이 태자 이건성(李健成)에게 진왕(秦王) 이세민을 제거하도록 늘 권했었다. 그런데 이건성이 실패하자 이세민은 위징을 불러들여 다그쳤다.

“너는 우리 형제 사이를 이간질 했다.”
“전 태자가 저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의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위징은 두려움 없이 답했다. 이세민은 본래 위징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자기를 죽이라 권했던 위징을 풀어주고 곧 첨사주부(詹事主簿)에 임명하였고 그의 많은 건의를 받아들여 태평성세를 이루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당시의 인물 고계보(高季輔)는 덕주(德州)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길 좋아했고 겸하여 무예를 익혔으며 어머니 상을 치르면서 효성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친형 고원도(高元道)는 수나라에서 벼슬하여 급현령(汲縣令)이 되었는데 고을 사람이 난을 일으켜 성을 빼앗고 적에게 붙음으로써 고원도는 헤를 입었다.

고계보는 무리를 이끌고 달려가 형을 죽인 자를 사로잡아 목을 베어 형의 묘에 올리니 식자가 장하게 여겼다. 이에 많은 도둑이 고계보에게 귀순하여 수천의 무리를 이루었는데 고계보는 이들을 데리고 당나라에 돌아가 의지하니 척주총관부(陟州總管府)의 호조참군(戶曹參軍)에 제수 되었다.

고계보는 이어 감찰어사(監察御使)에 발탁되면서 탄핵한 바가 많았는데 권세와 요직을 가리지 않고 논박했다.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승진되었다가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에 임명되었을 때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일일이 들어 상소했다.

태종은 이를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석종유(石鐘乳)한 제(劑)를 내리며 “약석과 같은 말(藥石之言)을 올렸으므로 약석으로 보답한다.”

그 뒤 고계보는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중서령(中書令)이 되면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겸했고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어 행시중(行侍中)으로 태자소보(太子少保)를 겸했는데 풍질(風疾)을 얻어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출판사 다할미디어 (02)517-9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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