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이란 우리 조상들이 이룩해 놓은 것을 통틀어 일컫는다. 그것에는 문화재로 등록된 국보급 유물에서부터 지방 민속자료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조상들의 삶의 단면과 정신적인 흔적을 보면서 오늘을 재조명하면서 보다 나는 내일을 설계하는 것이다. 이것이 후손들에게 문화유산을 물려주어야하는 이유이다.

○성안마을

성안마을 내력

인조 24년 (1646) 큰 장마에 공주 감영(監營)이 떠내려 가서 감영을 이곳에 옮겼다가 길이 너무 불편하여 효종 4년(1653)에 관찰사 강백년(姜柏年)이 감영을 봉황산 아래(현 공주사대부고)로 옮겼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전국의 읍성이 폐지되면서 공산성도 산성으로의 기능은 사라지게 되었다. 1907년 일제시기 들어 성안에는 민간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6·25 이후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1999년 2월  이주하기 전의 성안마을
성안마을에 인구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공주읍내 인구가 많았던 1960년대 무렵으로 성안마을에만 100여 세대가 살았다고 한다. 성안마을 주민들은 경작지가 없기 때문에 뱃사공(월천-사람들을 배로 건네주는 일) 또는 마부(馬夫) 등의 일거리로 생계를 유지했다.

성안마을은 2000년대 초 공주시의 백제문화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주민들이 이주가 본격화되면서 성안마을은 사라지고 마을제사(동제, 산제)도 사라졌다.

△1997. 4. 12 이주하기 전 성안마을
이주하기 전 성안마을 전경이다. 슬레이트 지붕의 성안마을이 1960년대 당시 우리네 주거형태를 보여준다.  공북루의 의연한 모습 너머 금강의 넓은 모래사장이 보인다.
 

△2016. 12. 30  유적 발굴 중인 성안마을터
백제 왕궁터인 공산성에서는 많은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었다. 특히 2010년 10월 성안마을 저수지터에서 백제시대의 옻칠 갑옷 천여점이 발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또 2015년 12월 백제시대 관청건물군도 발굴됐다. 공주대박물관 발굴단의 공산성 유적 발굴 중인 장면. 

이 기사는 공주문화원에서 발간한 ‘공주문화’에 실린 원고입니다.(327호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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