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연, 한지에 수묵, 114×227Cm, 2019

멀리서 보면 회백색 작은 바위처럼 보인다. 흔들림조차 없이 바람 속에 앉은 조그만 여자, 소년인가 싶은 한 사람이 두꺼운 옷을 입고, 아직은 옷깃을 여미는 봄날, 햇빛 한 줌 없는 동백 숲에서 낚시 의자에 앉아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

행촌문화재단에서 주최한 풍류남도 아트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밖에 없으니 그도 작가일 게다. 작가들은 삼삼오오 모여 움직이고 웃고 떠든다. 따뜻한 볕이 그리운 봄날에 그림도 그리며 오랜만에 본 반가움에 회포를 푸는 작가들 틈에서 조용히 묵묵히 뭔가를 하고 있다.

뭘 하고 있는지는 안다. 작가들이 여기저기 다니며 드로잉을 하고 있으니 그도 아마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본 이지연 작가 모습이다.

작년에는 수묵비엔날레 레지던시 작가로 목포에서 함께 지내며 조금 더 가까워졌다. 나의 안식당 프로그램에 설거지를 도맡아 해줬다. 성격이 꼼꼼하고 깔끔해서 항상 남들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으나 언제나 즐겁게 도와주었고 꽤 귀엽고 유쾌한 사람이다.

아침 설거지를 끝내면 화첩과 그림 도구를 들고 양산을 쓰고 목포 구도심을 그리러 나간다. 여름 땡볕을 피한다고 새벽에 골목길에 앉아 그림 그리다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만나 얘기하고, 낮에는 더운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운 동네 사람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그려라, 시원한 냉커피 한잔 마셔라,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며 안겨준 과자, 빵, 음료수를 들고 오후에 안식당으로 들어온다.

새벽에 길에 나가 그리다 보면 피곤해서 하루쯤 거를 만도 한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마다 안식당 프로그램을 도와준 것은 정말 고맙다. 골목길을 구석구석 담아내다 보니 세탁소, 이발소, 식당 등등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지난여름 목포를 누비던 그는 겨울부터 대흥사에 자리를 잡았다. 한주의 반은, 서울 반은 해남. 이제 대흥사 사람들이 그에게 먹을 것을 건네고, 그림 그리는 틈틈이 공양간에서 뒷설거지를 한다.

메마른 먹빛(渴筆갈필)을 덧칠하며 풍경을 담아낸다. 기름기라곤 없어 보이는 그를 닮은 그림, 손바닥만한 작은 한지부터 조금 더 큰, 그보다 더 큰, 풍경 앞에 한지를 들고 가서 마주하고 그린다. 바람과 마주하며 그리느라 바람에 날리지 않고 한눈에 들어오는 크기이다.

눈보라 치는 한겨울에도 이불 같은 옷을 걸치고 마스크,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장갑까지, 중무장하고 풍경이 되어 그곳에 있다. 이렇게 차곡차곡 모은 그림은 대흥사 대웅전 옆, 늘 문을 굳게 닫고 있던 백설당 문을 열었다. 저녁이면 북을 치는 침계루 아래층도 활짝 열었다. 햇빛도 바람도 만나지 못하고 사람의 온기도 없던 방문을 오랜만에 활짝 열어서 깨끗이 청소하고 그림을 내 걸었다.

지난겨울부터 대흥사 곳곳을 다니며 조각조각 모은 그림은 큰 그림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산수유랑, 겨울에서 여름까지. 나한전에 앉아 있는 나한도 모셔오고, 천불전 부처님도 모셔오고, 몇 백 년 잠자던 건물의 기둥, 보, 서까래도 모셔온다.

스쳐 지나가며 눈길 한번 주는 부도밭 담장 너머 부도도 모셔온다. 사람 발길이 잘 닫지 않는 표충사 뒤꼍에 나무, 겨울에 그린 절마당 나무는 봄이 되니 물이 올랐다고, 먹으로 그린 나무에서 계절감이 느껴진다고, 물오른 봄 나무가 보인다고 눈 밝은 사람이 말한다. 늘 옆에서 지켜본 큐레이터는 단번에 그것을 알아본다.

조선의 명필 이광사가 쓴 편액이 걸려있는 대웅보전,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 각각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는 천불을 모신 천불전, 세월과 역사, 시간,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시점이 다른 조각 그림을 분류하고 조합하여 한 화면에 담는 일도 그리는 시간만큼 시간이 필요하다.

이 여름을 나고 가을을 지나 겨울 문턱에 다다르면 또 다른 빛깔 대흥사를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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