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6일, 드디어 서간도 집안(集安)의 압록강 변에 섰다. 날씨는 쾌청하고 강물은 시리도록 푸르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그림처럼 떠 있다.

백두산부터 천리를 달려왔건만 압록의 물결은 지친 기색도 없다. 나는 강변에 서서 말을 잃었다. 천만년 역사의 무게가 묵직하게 명치끝에 실린다.

이 강과 산을 무대로 살았던 이름도 모르는 선조들의 생활의 현장이 환시로 보이고 환청으로 들린다.

내 고향의 금강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이것이 바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의미 있는 경험의 세계로 인도하는 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압록강을 만나기 위해 돌아온 길이 참으로 멀다. 흘러간 시간은 또 얼마나 아득한가! 강 건너로 보이는 평안북도 만포시의 산과 들이 지척지간이다. 손에 잡힐 듯이 보이지만, 소리를 지르면 들릴 듯이 가깝지만, 아직도 갈 수 없는 곳이다.

저승보다 먼 곳이 내 나라 북녘 땅이다. 내 나라를 남의 나라에 와서 구경만 하고 돌아서야 한다니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중국 요녕성의 집안 시이다. 남의 나라라고 하지만, 원래는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곳이다. 지금은 남의 나라 땅으로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과거에 우리 조상들의 삶의 무대였다는 사실을 삭제하거나 변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중국 측에서는 고구려의 역사를 한국의 역사가 아닌 중국의 역사로 둔갑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북공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집안 시 일대를 고구려 발상의 성지이자 청 왕조가 일어난 땅이라고 하면서 고구려나 청나라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삼고 있다.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청나라도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가 아니고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니 엄밀하게 보자면 중국의 역사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패도적 역사전쟁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안팎으로 부딪히고 있는 당장 어쩔 수 없는 이 역사의 안타까운 현실 앞에 현기증이 인다.

집안 시로 오는 길에 환인(桓仁) 시의 오녀산성에서 온돌 유적이 있는 것을 보았다. 구들을 사용하는 온돌 방식은 우리 한민족 고유의 주거문화이다. 이 온돌 유적은 오녀산성이 고구려 유적이며, 당연히 한국의 고대사에 귀속되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환인이라는 지명도 우리 고대사의 환국(桓國)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환국의 어진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는 뜻으로 환인이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오녀산성의 온돌 유적은 중국 측에서 강행하는 동북공정이 억지라는 것을 밝혀주는 고구려 조상들의 무언의 항변이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외세에 휘둘리지 말라는 따끔한 회초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집안 시는 남쪽으로 압록강 건너에 우리나라 평안북도 만포시와 접하고 있는 중국 길림성 남부의 압록강 중류에 있는 작은 현급 도시이다.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 광개토왕릉비, 장수왕릉(장군총), 국내성, 환도산성 등 고구려 유적이 산재되어 있어서 한국의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광개토대왕릉과 비문을 볼 때의 일이다. 현장에 중국의 공안이 배치되어 있었다.

문화유적의 현장에 공안을 배치하는 것도 그리 흔치 않은 일이거니와 관광객을 대하는 태도도 심상치 않았다. 마치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이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구려 시대의 우리 조상의 역사 유적이지만, 지금은 남의 나라 땅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잃어버린 우리 고대사의 아픔이 아닐 수 없다. 단재 선생이 상고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이런 아픔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발길을 돌려 다시 압록강 변에 섰다. 강 남쪽으로 만포시의 산하는 나를, 나는 만포시를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다. 강 하나만 건너면 내 나라 내 고향이건만, 갈 수가 없는 고향 땅이다. 천만 이산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저승에 가는 것보다 더 가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잃어버린 고대사의 아픔과 비참하게 일그러진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중첩되어 흐르는 집안 시의 압록강 강변에 서서, 흐르는 물결 위에 내 복잡한 상념의 한 조각을  혼잣말과 함께 실어 보낸다. 압록강은 여전히 푸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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