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임된 의회 Developed Parliament뱅크시(Banksy 1974?- ) 2009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박 작가가 “뱅크시가 일냈네.”라고 한다. 소더비 경매에서 약 15억 원에 낙찰된 그림이 액자에 숨긴 분쇄장치가 작동하며 절반이 가늘게 잘렸다.

경매장은 순간 혼란에 빠졌다. “뭐야 테러?” 뱅크시는 사건 하루 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액자에 분쇄기를 설치하는 모습과 낙찰 후 그림이 잘려나가는 영상을 올리며 ‘풍선과 소녀 (Girl With Balloon)' 그림 전체를 파쇄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자신을 '예술 테러리스트'라 부르는 뱅크시는 기존 미술계와 정치를 비꼬는 해학과 풍자로 유명하다. 경매로 새롭게 태어난 이 작품은 '쓰레기통 속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원래 낙찰받았던 사람에게 돌아갔고 주최 측과 공모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15억에 파손된 그림이라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뱅크시는 모두가 주목하는 자리에서 한바탕 퍼포먼스를 했다. 이 사건으로 뱅크시를 새롭게 알게 된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는 뱅크시에게 당했다며 이를 흉내 낸 게시물이 올라왔다. 다시 한번 그의 영향력이 널리 퍼지는 순간이었다. ‘풍선과 소녀’는 2002년 런던 쇼비치 근교에 그린 벽화이고 뱅크시의 대표작으로 꾸준히 재생산된 이미지이다.

2019년 또 한 번 주목할 전시가 열렸다. 영국은 3월 29일 유럽연합을 탈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의 브렉시트 합의안은 영국 하원에서 3번째로 부결되었다. 이로써 4월 12일 노딜 브렉시트로 EU를 떠나거나 5월에 있을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탈퇴 시점을 연기해야 했다.

그런데 이날 영국 브리스톨 뮤지엄 & 아트 갤러리는 뱅크시의 작품을 내걸었다. 10년 전, 이곳에서 전시된 적이 있는 작품이었다. 위임된 의회(Devolved Parliament). 의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인데, 의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침팬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0년 전의 작품을 다시 내건 이유는 사실상 브렉시트를 놓고 아무것도 합의하지 못한 영국 하원에 대한 풍자이다. 국민투표 후 3년이 지나도록 브렉시트는 물론 영국이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지 못하는 무능한 의회를 비꼰다.

진화론자들이 인간의 조상이라고 하는 침팬지는 영화 혹성탈출에서 퇴화한 인류와 맞서는 진화한 유인원으로 등장하며, 생존을 위해 격렬하게 인간과 맞선다.

영국의회를 장악한 이들도 진화한 유인원 시저의 무리가 아닐까? 귀는 막아버리고 입만 사용하는 인간을 대신해 침팬지에게 의회를 위임했다.

현재 영국은 새로 보리스 존스 총리가 취임했고 브렉시트 비관론자들과 회의론자들은 틀렸다며 10월 31일 유럽연합을 탈퇴하겠다고 했다. 새로운 합의, 노딜 브렉시트, 조기 총선, 불신임 투표, 취소 등 여러 가지로 시끄러운 영국이다.

지구 반대편 나비의 날갯짓으로 태풍이 올 수도 있다지만 시끄럽기는 먼 나라 영국에 뒤지지 않는 우리나라다. 국회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의원들, 의견이 다르면 밖으로 나가고 보는 그들을 내보내고 우리도 침팬지, 아니면 토끼와 거북을 데려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얼굴도 모르고 나이, 출신, 심지어 이름도 확실하지 않은 뱅크시는 전 세계 도시, 분쟁지역의 건물 벽, 지하도, 담벼락, 물탱크 등 거리 곳곳에 그래피티를 남기는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그는 사회 풍자와 파격적인 주제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유명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걸어두기도 하고, 베니스 비엔날레에 깜짝 길거리 전시를 하기도 했다.

2003년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뱅크시는 1974년생 백인 남성이며 14살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낙서화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량 청소년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볼 이력이다.

10월 3일 이 그림이 경매에 나온단다. 브렉시트와 브리스톨 미술관 전시가 그림 가격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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