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화상나혜석 羅蕙錫, 1896~19491928, 캔버스에 유채, 60×48cm,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딸로 태어난 내 친구는 아버지가 아들로 출생신고를 해서 초등학교 입학하는데 남자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남동생이 태어난 후에는 남자 앞길 막는다고 중학교도 보내지 않아서 일하며 어찌어찌 고등학교에 왔는데 등교할 때는 교복도 가방도 없이 집을 나섰다고 얘기한다.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잘해서 성적이 좋았는데 장학금 받으며 교대를 나와서 지금은 선생님이다. 몇 년 전 내 개인전에서 아버지가 유학을 못 보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눈시울을 붉혔을 때 그 친구가 내 아버지에게 한 말이다.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친구는 늘 밝은 표정으로 명랑했고 주변에 친구도 많았다. 그 말을 듣는데 미안하고 속이 많이 상했다.

요즘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본 사람들의 리뷰가 쏟아진다. “공주님입니다.”는 소리를 듣고 펑펑 우셨다는 엄마, 여자로 살아갈 딸의 인생이 불쌍해서 내 딸이 나처럼 살까 안타까워서 우는 엄마. 나는 영화 보기가 두려워서 계속 미루고 있다. 엄마에게 치매가 오고 있다.

엄마는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를 찾으며, 보고 싶다고 자주 운다. 설명해도 말이 통하지 않고 속상해서 목소리만 커진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내 입장에서 말하는 나를 본다.

학교 선생님인 아버지에게 시집와서 시집살이하며 어려운 형편에 부모님을 보러 가지도 못하고 집에 모셔서 따뜻한 밥 한번 해드리지 못한 것이 엄마 마음에 깊숙이 콕 박혀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 달에 한 번은 부모님 집에 가서 같이 밥을 지어 먹고 온다.

가까이 살 때는 자주 봤지만, 공주로 이사 온 후로 이런저런 핑계로 뜸해졌다. 그래서 무조건 한번은 얼굴을 보고 쑥스럽지만 꼭 안아본다.

나혜석이란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최초로 자유연애를 주장하고 이혼한 신여성,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등등.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독립운동을 도왔고 3.1운동에 참여해 투옥됐던 것은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사생활과 가십이 삶의 전부처럼 포장되어 있다.

그녀가 현재에 살았더라면, 그녀의 말이 신문이나 잡지, 동인지가 아니라 SNS에 올라왔다면, 행려병자로 무연고 병동에서 죽을 때까지 사람들은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악플을 견디다 다른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영정 사진 속에서 밝게 웃고 있어서 보는 사람 가슴을 더 후벼 파는 셜리처럼. 너무 씩씩해서 전혀 몰랐던 내 친구처럼. 꿋꿋하고 강인해 보이는 사람도 실상 어렵게 견디고 있다.

긴 얼굴에 크고 긴 코, 음영으로 도드라진 광대뼈, 크고 검은 눈, 일자로 다문 입은 강건하지만 공허해 보인다. 짙은 초록색 옷은 배경인 청색과 연결되고 갈색 배경은 머리카락과 얼굴, 옷깃으로 연결되어 포갠 손에서 멈춘다.

당시 사회가 그녀를 삼켰듯 배경이 그녀를 삼키는 것 같다. 여자도 남자도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닌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 자화상 속 얼굴이다.

80년 전, 여자보다 사람을 외친 나혜석이 살았던 시대와 현재는 무엇이 달라졌나?
 
노라를 놓아라 / 최후로 순수하게 / 엄밀히 막아 논 / 장벽에서 / 견고히 닫혔던 / 문을 열고 / 노라를 놓아나주게 //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 의무같이 / 내게는 신성한 의무있네 /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 사명의 길로 밟아서 / 사람이 되고저
나혜석의 시 「인형의 집」, 『매일신보』(1921.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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