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신산(辛酸)을 드러낸 리얼리즘 시편들

비 오는 날, 스멀스멀 송신증이 이는 날
검은 청빛 낯빛 고운 여우를 따라
집을 나선다. 건물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도시를 빠져나간다.
뿌리를 보이며 춤을 추는
나무들이 만드는 시간의 숲을 지나
동굴 속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찾아 동굴을 나서고
바위산을 넘어, 뿌연 강을 건너
동굴과 멀어진다. 빌딩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도시 한가운데
여자는 서 있다. 흠뻑 젖어
빙글빙글 서 있다. 검은 청빛 낯빛 고운 여우
응애응애 꼬리를 나풀대고 있는데…….

성배순 시인의 ‘세상의 마루에서’ 시집이 발간됐다.
이은봉(시인, 광주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인문학연구소 소장)시인은 “성배순 시인의 시는 깊다. 시의 깊이는 사유의 깊이에서 온다. 깊은 사유는 선입관을 갖지 않을 때 태어난다. 선입관은 일종의 편견이다. 편견을 갖지 않으려면 사물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사유의 깊이는 사물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형성된다. 이는 성배순 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물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통해 사유의 깊이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시집의 시에서 화자인 시인은 여행 중에 있거나 생활 중에 있을 때가 많다. 여행 중에 있을 때는 현지의 체험에서 얻는 성찰이나 반성, 깨달음이 시가 되고, 생활 중에 있을 때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얻는 진리나 지혜, 정안(定安)이 시가 된다. 「메두사를 위하여」, 「터키블루, 나의 글루밍 썬데이」, 「천사의 눈」 등처럼 화자가 여행 중에 있는 경우이든, 「꽃을 보면 배가 고프다」, 「우리 엄니 시집을 가시네」, 「달맞이꽃」 등처럼 화자가 생활 중에 있는 경우이든 그의 시는 대상과 관계에서 깊이 있는 진리와 지혜, 정안을 발견하는 과정에 창작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를 깊은 시로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재치 있으면서도 깊이 있는 그의 시가 독자들 모두에게 큰 울림을 주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김백겸(시인, 전 웹진 『시인광장』 주간)시인은 “성배순 시인의 시집 『세상의 마루에서』는 인생의 신산(辛酸)을 드러낸 리얼리즘 시편들과 시인이 발 딛고선 자리를 신화적 시각으로 확장해서 쓴 시편들로 나뉜다. 나에게는 유미주의(唯美主義) 시각이 들어간 후자의 시편들 즉,「세상의 마루에서」, 「진눈깨비」, 「나는 펫」, 「터키블루, 나의 글루밍 썬데이,」 등이 더 다가왔다. 성 시인이 어느 방향으로 시의 정체성을 확립할지가 흥미로운 일. 공자의 말씀처럼 방향을 정하면 느리더라도 멈추지 말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게 중요하다”고 제안했다.

성배순 시인

2004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계간 《시로여는세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어미의 붉은 꽃잎을 찢고』, 『아무르 호랑이를 찾아서』, 그림책 『세종호수공원』, 시비집 『세종·충남 詩香을 찾아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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