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궤불식(簠簋不飾)

제사에 쓰이는 그릇인 보와 궤를 갖추자 않았다는 뜻으로 고직자의 비리를 완곡하게 표현하여 단죄함을 일컫는다. [한서 가의 전 漢書 賈誼 傳]

가의(賈誼)는 한(漢)나라 낙양(洛陽)사람이다. 18세에 시와 글을 잘한다는 소문이 고을에 널리 퍼졌다.

오공(吳公)이 하남태수(河南太守)로 왔을 때 수재 가의의 이름을 듣고는 문하에 두고 매우 아꼈다.

문제(文帝)가 즉위하자 하남태수 오공의 치적이 천하제일이라 하여 검찰총장격인 정위(廷慰)에 임명했다.

오정위는 가의가 나이는 적으나 제자백가의 글에 통한다고 추천했고 문제는 가의를 박사(博士)로 임명했다.

20여 세에 지나지 않은 가의는 황제의 명으로 일이 있을 때마다 노성(老成)한 사람들도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척척 응답하여 여러 사람의 경탄을 자아냈다. 가의는 황제와 대신들의 인정을 받아 지위가 거듭 높아지면서 1년 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렀다.

가의는 달력을 개정하고 복식(復飾)을 바꾸고 관직의 이름을 정하고 예악(禮樂)을 진흥시키는 개혁안을 제출했다.

이 개혁안은 빠뜨림 없이 모두 채택되었다. 문제는 가의에게 공경(公卿)의 지위를 내리려 했으나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중지 되었고 비방과 중상이 계속되자 문제도 결국 가의를 소원히 대했다.

가의는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에 임명되어 지방으로 내려갔다. 장사(長沙)로 좌천되어 가는 침울한 심정에 상수(湘水)를 건너며 옛날 초(楚)나라 지사 굴원(屈原)을 생각하고 부(賦)를 지었다.

장사는 낮고 습한 곳이라 가의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부임하여 3년이 되던 어느 날 가의의 책상머리에 올빼미가 날아와 한가로이 앉은 일이 있었다. 가의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깨닫고 언짢아하면서 역시 부를 지어 스스로를 위로했다.

가의는 1년 뒤에 문제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돌아가 양회왕(梁瀤王)의 태부가 되었다. 문제의 작은 아들인 양회왕은 독서를 즐겼으므로 학문이 높은 가의를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때 가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현 정세를 살펴보면 통곡할 일이 하나요, 눈물지을 일이 둘이요, 탄식할 일이 여섯입니다.”하고 정치, 경제, 국방 등 각 분야에 걸친 혁안을 건의했다.

‘양태부가의상소(梁太溥賈誼上疏)’호 불리는 이 논술은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선비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 개혁안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백성에게 예의염치(禮義廉恥), 곧 예절과 의리, 청렴과 수치를 알게 함은 정치의 기본입니다. 윗사람이 이를 실천하면 백성들은 자연 동화됩니다. 백성을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아랫사람의 체모를 높여야하고 형벌에 있어서도 체모가 지켜지도록 해야 합니다. 일반 서민에게는 예절을 규정하지 않았고 대부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음은 아끼는 신하의 체모를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옛날 대신이 비리로 축출을 당하게 되면 곧바로 부정이라 말하지 않고 제사에 쓰이는 그릇인 ‘보궤를 갖추지 않았다(簠簋不飾)’하여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음란행위를 저지른 경우에 직접 음행이라 말하지 않고 ‘휘장이 엷어 남에게 부끄러움을 드러냈다(帷薄不修)’고 했습니다. 무능하여 면직이 된 사람에게는 ‘소속직원이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下官不職)’고 했습니다. 이처럼 대신의 죄과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것은 윗사람이 예의염치를 가지고 아랫사람을 대하게 되면 아랫사람이 절도 있는 행동으로 윗사람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이 우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하지 않은 자는 인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풍이 이루어지게 되면 신하된 자는 모두 제 행동을 돌아보고 사욕을 잊고 절도를 지켜서 의를 아ㅍ세울 것입니다.”

양희왕이 갑자기 말을 타다 떨어져 죽자 가의는 스승의 책임을 느끼고 울다가 1년여 만에 역시 사망하니, 가의의 이때 나이는 아깝게도 33세였다.

출판사 다할미디어 (02)517-9385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