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슬추연(加膝墜淵)

무릎에 앉혔다가도 못에 밀쳐 넣는다는 뜻으로 사랑과 미움의 변화가 더 없이 심하다는 일컬음이다. [명사(明史) 권 251]

명(明)나라 사람 문진맹(文震孟)은 오현(五縣)출신이다. 전시(殿試)에서 수석을 하고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

이때 위충현(魏忠賢)이 권세를 부리기 시작하자 빌붙은 자가 많았다. 대신을 배척하여 내쫓거나 옥에 가두는 일이 잦았다. 문진맹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글을 올렸다.

‘…폐하께서 새벽에 나오셔 정사에 근면하신데 예관(禮官)이 절하고 일어서는 것은 꼭두각시가 등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위충현은 이 글을 위에 올리지 않다가 임금이 연극을 관람할 때 ‘꼭두각시 등장’이란 문구만을 적시하여 문진맹이 임금을 꼭두각시에 견주었다며 ‘엄벌을 처하지 않으면 천하에 위엄을 보일 수 없습니다.’고 아뢰니 임금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대체로 문장의 아래 위를 읽어야만 어디에 뜻이 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일임에도 간사한 무리는 단장적구(斷章摘句), 곧 거두절미하고 특정구절만을 들어서 모함하거나 한 두 글자 바꾸어 필자를 궁지로 모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그런 행위로 공박하고 비난하는 일이 없지 않다.

문진맹이 경연(經筵)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위충현이 문진맹에게 장(杖)80대를 치라는 명이 내려졌다고 하였다. 이때 수상은 휴가 중이었고 부상 한광(韓爌)이 극력 반대하였다.

이어 서길사(庶吉士) 정만(鄭鄤)의 글이 또 올라왔다. 이에 두 사람 모두 강등시켜 지방 직책에 보하라는 명이 내렸다. 언관들이 구명에 나서 문진맹은 부임길에 올랐다가 돌아왔다.

문진맹이 좌중윤(左中允)으로서 경연에서 ‘논어’를 강(講)할 때 ‘임금은 신하를 부리되 예(禮)로 대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반복해 설명하니 임금은 옥에 갇힌 상서 교윤승(喬允升)과 시랑 호세상(胡世賞)을 풀어주라 하였다. ‘서경’의 ‘오자지가(五子之歌)’를 강(講)할 때 임금은 책상 다리를 하고 있었다.

‘윗사람이 된 자 어찌 공경치 않으랴(자세를 바르게 함)’라는 문항에 이르러 문진맹이 무릎 위의 발에 눈길을 보내자 임금은 소매로 가렸다가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예부시랑 주병모(周炳謨)가 ‘광종실록(光宗實錄)’을 편수하면서 여러 사건을 숨김없이 직필로 서술하였다. 위충현이 어사(御史) 석삼외(石三畏)를 사주하여 주병모를 탄핵하여 면직시키게 하고 실록을 다시 편찬하여 시비가 뒤바뀌게 하였다. 문진맹이 몇 가지 그릇된 점을 들어서 개정하도록 요청하니 임금은 조정신하를 불러놓고 직접 논의했으나 결국 위충현의 무리에 의해 저지되었다.

적이 봉양(鳳陽)의 황릉(皇陵)을 침범하였다. 문진맹이 난이 일어난 원인을 설명하고

“일을 맡은 신하가 직무를 다하지 않아 국론이 분열되었고 ‘무릎에 앉혔다가도 연못에 처넣음(加膝墜淵)’은 사랑과 미움의 변화가 심한 데에서 말미암았습니다. 폐하께서 애달파 하시는 글을 내리시고 법대로 집행이 되지 않은 일을 바로잡고 나라를 그르친 자를 처단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정사를 행하고 민간에 쌓인 관가 및 사가의 빚을 늦춰주고 벼슬자리나 지키려는 자를 내쫓고 좋은 계책과 역량을 널리 모아 혼란한 국정을 진정시키소서.”

임금은 반기는 뜻으로 회보하였으나 모두 시행이 되지 않았다. ‘가슬추연’은 ‘예기’ 단궁(檀弓)에 나오는 자사(子思)의 말씀이다.

‘불러들일 때에는 무릎에라도 앉힐 듯이 사랑을 쏟다가도 미움이 생겨 물리칠 때에는 연못에 밀쳐 넣듯이 한다(進入若將加諸膝, 退入若將墜諸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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