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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월선정에서 탄은 그리다
公山 月先亭 灘隱 寫
2020년 03월 24일 (화) 11:21:34 최명진(공주시 학예연구사) 3777@kknews.co.kr

조선시대 대나무는 군자를 상징하며 사대부들에게 사랑받았다. 월사 이정귀(月沙 李廷龜)는 대나무를 일컬어 ‘본성이 곧은 것은 바른 사람의 마음이고, 속이 빈 것은 군자의 본심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을 정도. 사대부들이 대나무 그림을 방에 두고 감상하는 일은 초연한 자세로 자신을 수양하는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화가에게 앞 다투어 그림을 부탁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였을까.

조선시대 묵죽화의 대가로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인물로 탄은 이정(灘隱 李霆, 1554~1626)이 있다. 이정은 임영대군의 증손이자 묵죽화로 이름을 날리던 종친 화가였다.

그의 묵죽화를 일컬어 윤신지(尹新之, 1582~1657)는 ‘석양공자의 먹의 묘리는 천하에 오묘하여 중국인들도 한 폭이라도 얻으려 값에 한정을 두지 않았다’라고 했고, 권상하(權尙夏 1641~1721)는 ‘지금까지의 作者는 무수히 많으나, 오직 탄은 노인의 명성만이 드높고 아름답다.

灘翁의 묵죽은 천하에 뛰어나 一時에 그 가치는 높고 그림 한 장 얻기 어렵다’라며 최고의 평가를 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최근 보물로 지정된 이정의 『삼정첩』과 5만원권 뒷면에 실린 그의 풍죽도를 보면 그의 높은 예술성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실로 다대한 것이다.

   
이정의 삼정첩(三淨帖)의 고죽(枯竹). 좌측면 기년명을 보면 공산 만사음에서 탄은 그리다라고 적혀있다.

   

 5만원권 뒷면의 풍죽도.

그런데 사실 이러한 그림들의 지역적 배경이 공주(公州)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이정은 공주에 정자를 짓고 30년 이상 머무르며 최고의 묵죽화를 탄생시켰다. 기년명이 전해지는 작품의 관지에서 ‘공산 월선정(月先亭)’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고향이 마치 공주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실제 그는 공주 월선정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예술창작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이고, 어떻게 공주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이정의 삶이 공주와 인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 조금씩 그의 삶에 다가가고 있다.

아직은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지만, 공주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역사 인물들의 행적을 통해 지역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확장되길 바라는 차원에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탄은 이정(1554~1626) 9)의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이다. 부친은 전주이씨 익주군 이지(李枝), 증조부는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 이구(李)이다.

즉, 이정은 세종의 현손이 된다. 말년에 석양정(石陽正)에서 석양군(石陽君)으로 진봉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임영대군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도왔던 인물로서 세조가 집권하며 그를 포함한 임영대군의 후손들은 부유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청, 장년기 이정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중년 이후의 기록들이 단편적이지만 여러 인물들의 문집에 산발적으로 남아 있다.

본격적으로 이정이 역사에 드러나는 순간은 임진왜란 당시 모습이다. 전쟁터에 나갔다가 오른팔에 칼을 맞아 거의 끊어졌고, 이후 나은 상처가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이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이정과 친밀했던 간이 최립은 1594년 이정의 그림을 선물 받고 나서 ‘대는 옛날과 같은데 더욱 진보되어 있었다’라고 하였다. 위의 정황은 그의 문집에 상세한데 아마도 이정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회화에 소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정은 어느 때인가 공주로 이거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유나 시기가 확실하지 않다. 그의 장조카 이덕온의 『구촌집(龜村集)』의 「題灘隱公山別業」이란 글에서 ‘평생을 전원의 정취를 금하지 않더니 늦게야 공산에 별업 한 채를 지으셨네’ 라는 것으로 보아 말년으로 짐작된다.

공주에서 그린 기년작으로 가장 이른 작품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묵죽(墨竹)>인데 ‘만력 갑오년(1594) 12월 12일 공산 만사음에 우거하여 그리다’라는 관지로 미루어보아(앞선 사진 참고) 1594년을 공주로 이거한 시점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덕온과 1592년 임진왜란 중 주고 받은 편지에 ‘호서(湖西)의 고택(古宅)에서 헤어졌다’ 라는 구절이 있어 이미 그 이전부터 공주에 별업을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정은 공주에 정착하며 ‘월선정(月先亭)’을 지었다. 그와 친밀했던 이정귀에게 직접 정자의 위치나 풍경,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설명해 주고 기문을 부탁했다. 

“사람들은 석양정 중섭을 삼절이라 부른다. 중섭은 시는 두보를 배웠고, 글씨는 진인(왕인지)를 배웠으며 그림은 더욱 천하에 이름났다. 그는 일찍이 공산에 집을 짓고,  그 정자를 내세워 이르기를 월선(月先)이라하고 나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그말에 이르기를 ‘금강이 남류하고 계룡산이 서쪽으로 뻗어 이어지면서 큰 마을을 만들어내니, 이를 만사음(萬舍陰)이라 한다. 정자는 마을 높은 곳에 있으니 .....(중략)...물은 마을을 비스듬히 감돌아 흘러 花津으로 달려 들어오는 것이 이를 곡화천이라고 한다. (중략)...솟아올라 언덕을 이루고, 움푹 패어 연못을 이루니 휑하니 뚫려 계곡을 이루고,,,천그루의 대나무만 근엄히 둘러서있다. 또 큰 매화나무 10그루가 집 근처에 있어 그 집 이름을 십매헌이라 하여 따로 구별하였다. 바람불고 달이 오르면 향기와 그림자가 방안에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이 내집의 빼어남이다. (중략)... 정자의 승경이 이와 같다면 유독 월선이라고 이름한 것은 어디에서 취한 것인가. 아! 내가 그것을 알겠구나. 무릇 달이란 혼자서는 가치가 없는 사물이다. 그러나 산은 반드시 달을 얻어야 높아지고, 물은 반드시 달을 얻어야 맑아지고 들은 달을 얻어야 멀어진다. 달이 먼저 정자에 오른다면 땅이 높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다. 땅이 높고 또 달을 얻었다면 정자는 이미 빼어난 것이니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이글은 아직 월선정을 방문하지 못한 이정귀에게 이정이 직접 전한 것이므로 그와 직접 조우한 것 같은 특별함이 느껴진다. 달빛 속에서 느껴지는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즐겼던 이정. (우측 그림: 이정의 문월도 問月圖, 간송미술관 소장) 그는 월선정을 짓고, 그 곁에는 집을 마련해 십매헌(十梅軒)이라는 현판을 걸어 두었다.

글에는 이정이 공주에 가진 애정 뿐 아니라 자연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그의 성격도 알 수 있다. 실제 그는 중년과 말년 대부분을 거의 이곳에서 보내며 주옥같은 묵죽화들을 탄생시켰다. 한국 묵죽화의 대가로 평가받는 이정의 회화적 영감을 주었던 곳이 공주였음은 새롭게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공주에서 그려진 이정의 삼정첩 속 대나무 그림들. 바람에 의연한 대나무의 기운이 느껴진다

   

공주에서 그려진 이정의 삼정첩 속 대나무 그림들. 바람에 의연한 대나무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렇듯 월선정은 작품활동의 배경도 되었지만, 교유 인물들과 만나는 친분의 장이기도 했다. 월봉 고부천(月峰 高傅川)의 문집에는 ‘왕손의 그림 같은 집은 험한 산에 눌려있고, 한 여름인데도 오르니 더운 기운이 없구나 푸른 술잔 기울이니 날 저무는 줄 모르고 검은 머리 서로 취하여 가는 말안장에 오르네’라는 글이 남겨져 있다.

이외에도 간이 최립(簡易 崔),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 어우 유몽인(於于 柳夢寅) 등의 문집에는 공산 월선정에 대한 글, 그리고 탄은과 주고받은 시 등이 전해지고 있다. 

뿐 만 아니라 이정은 공산성과 금강을 배경으로 활동했던 모습도 보인다. 1605년 이정은 공주에 유배 와있던 가휴 조익(可畦 趙翊)과 함께 공산성에 올랐고(『공산일기(公山日記)』), 1616년에는 송남수(宋壽)와 충청도 관찰사, 공주 목사와 함께 뱃놀이를 즐겼다.(『송담집(松潭集)』)

이정은 직접 정치에 목소리를 내진 않았다. 다만 광해군 대에는 일절 조정에 나가지 않아 당시 상황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광해군 일기』에는 종친을 감시하던 종부시에서 이정을 ’태만한 종친‘으로 파직해야 함을 종용하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인조 대는 달랐다. 이정 사후 인조가 내린 제문에 따르면 이정에 대해 ’나라가 어려울 때를 당해 재화를 보내니 거듭 가상하였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때는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가 어려움에 있던 때를 말하는 듯 하다.

인조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파천했고, 그 때 이정이 공주에 있었으니 그들의 만남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흔을 넘긴 후 거동이 불편해 질 만큼 병색이 심해져 인조를 직접 호종하진 못했던 듯하다. 이러한 내용은 1625년(인조 3) 임금을 그리워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조카 이덕온에게 부탁하여 올린 상소에 상세하다.   

이정은 73세인 1626년 생을 마감했다. 기력이 다했음에도 죽기 1년 전 마지막 혼신의 힘을 기울여 <우죽(雨竹)>이란 작품을 완성했고, 오준(吳竣)에게 주었다. (오준은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자, 공주 우성면 단지리에 사우가 있는 동복 오씨 오백령(吳百齡)의 아들이다. 이인면에 있는 이귀의 신도비문도 그의 글씨도 새겨졌다.) 평소 이정의 소질과 품성을 아꼈던 인조는 김육(金堉)을 통해 제문을 작성하게 했다. 

가장 이른 기년작인 삼정첩의 1594년을 기준으로 봐도 그의 공주살이는 무려 32년간 이어졌다. 『조선왕조선원록(朝鮮王朝璿源錄)』(이하 선원록)에 따르면 그는 ’이인역 군안리(利仁驛 群安里)’에 묻혔다. 군안리의 현지명은 구암리(龜巖里)이다. 구암 2리 마을 회관 앞 안내판에는 ‘세종의 19번째 아들 석양군의 묘가 있어 군안리(君安里)라고 불렀다’는 마을 유래가 쓰여 있다.

실제 마을 안에는 도로명 ‘군안길’이 사용 중이다. 임금의 아들이 묻혀서 ‘군안’이라 했다는 마을 주민들의 전언과 마을 안내판의 내용은 그동안 공주와 관련된 각종 지리지 읍지 등에서 이정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없었던 것에 비하면 비교적 구체적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정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가 있다. 동네 주민들은 마을 어른들이 옛부터 장군묘라고 불렀다고 하며 예전에는 묘가 상당히 컸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오랫동안 관리가 안 되었던 듯 봉분이 상당히 무너졌으며, 주인을 알 수 있을 그 어떤 표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무심히 말하듯이 봉분 위로는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주변으로는 당초 왕손의 묘로 갖춰지기 위해 쌓았을 법한 석축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자기 파편 일부도 수습할 수 있었다. 

   
구암 2리 탄은 이정으로 추정되는 묘

   
마을 안내판

   

묘에서 내려다 본 마을 전경 

그렇다면 이정이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던 위치는 어디였을까? 앞선 이정귀의 기문으로 돌아가 보자. 만사음과 월선정의 위치는 곡화천(曲火川)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곡화천은 우리말로 ‘구부내’로도 알려져 있는데 탄천면에 흐르는 천으로 오늘날 신영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글에 따르면 곡화천 인근에 대나무가 많은 곳, 만사음(萬舍陰)이란 곳이 있었고, 이 부근의 경승지로서 지대가 높은 곳에 월선정이 위치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정자는 현존하지 않고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다만 만사음이란 명칭으로 이인면 만수리로 추정하거나, 탄은의 호가 탄천(옛 반탄면)의 탄(灘)에서 연유했고 후손들의 묘가 만매동이라는 족보기록으로 탄천 일대로 짐작만 될 뿐이다.

『선원록』에 따르면 이정의 장남 이덕진(李德)의 묘는 이정과 같은 이인역 군안리(利仁驛群安里), 차남 이덕호(李德浩)의 후손들 묘는 곡화천 만매음(萬梅陰), 만송음(萬松陰), 만매동(萬梅洞) 등 이다.

또한 그의 동복형인 학성감의 이림과 그의 후손들의 묘가 ’공주 곡화천 가절리(嘉節里), 죽전동(曲火川 竹田洞)‘이라고 나와 있다. 대부분의 지명들은 1895(고종 32) 행정 구역 정비에 따라 통폐합되어 자연지명 정도로만 전해지지만, 모두 조선시대 탄천과 이인 일대에 존재했던 마을이었다.

한글학회에서 발행한 『한국지명총람-공주편』에는 탄천면 안영리에 ’만매동(萬梅洞)‘라는 지명이 전하고 있어 확인해 보았지만 현재 대부분 파평윤씨 문중의 산소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처럼 아직은 밝혀져야 할 것이 더 많지만, 현재로서는 족보의 정황을 통해 이정을 포함한 전주이씨 임영대군의 후손들이 탄천과 이인 일대에 거주했었다는 사실 정도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사후 월선정은 먼지가 쌓이고 쓸쓸함이 가득하고 어두워질 정도로 퇴락했다고 이덕온의 『구촌집』에 전하는데, 아마도 그가 돌아가고 나서 정자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집안이 쇠락했던 것 같다.

또한 18세기 문인인 정극순(鄭克淳)의 시문집 『서윤공유고(庶尹公遺稿)』「석양군전」에는 ‘자손들이 쇠미하여 그림이 권력자들의 손에 들어가고 집에 전하는 것은 2첩의 뿐’이라고 전하여 그림 또한 흩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늘날 공주에서 이정의 흔적을 찾는 일이 쉽지 않게 된 요인 중에 하나일 것이다. 

자연을 즐기며 때로는 대나무와 같이 강직하게 살아온 이정의 인생이 공주 어딘가에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탄천 이인 일대의 유독 눈에 띄이는 대나무 어디쯤엔가 달을 바라보는 초연한 왕손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하다.

지금까지 이정 생애는 미술사학자들에게 회화 중심으로 연구되었지만, 필자는 그가 살았던 터전이요, 예술창작 혼을 불러일으켰던 배경이 공주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조금 더 공주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고자 했다. 후일 그 깊은 인연을 더 밝혀내는 것을 지역사의 과제로 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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