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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밭에 호박을 심는다
2020년 05월 11일 (월) 09:47:16 안혜경 3777@kknews.co.kr

   
▲ 안혜경 1964~ 112.1×193.9㎝ 리넨에 아크릴 2016

몇 해 전 해남에 있는 행촌 문화재단 레지던시 작가로 해남 이마도에 머물며 작업을 했다.

공주 산골에서 2012년 겨울부터 살았으니 4년 만에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 셈이다. 산골마을 로 이사 한 후로는 매일 바뀌는 새로운 풍경에 매혹되어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당에 나무와 꽃을 심고 풀을 메고, 먹을 수 있는 푸성귀를 채집하고,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고 갖가지 작물의 밭농사를 하는 일이 매일 여행하는 느낌이었다.

여행에 대한 갈증도 없고 눈뜨면 집 안팎으로 할 일이 많아 다른 생각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햇살에 눈을 뜨며 문득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그림은 그렸으나 작업실보다 집과 텃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익숙하지 않은 일로 몸은 힘들었고 농사일도 형편없었다. 작가에게 작업실은 중요하다. 일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 긴 시간 집중할 수 있는 곳, 나의 작업실을 위해 시골로 이사 왔는데 작업실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꿈꾸던 최고의 작업실을 지었지만, 늘 지내는 익숙한 공간은 새로운 무언가를 꺼내기에는 부족하다. 익숙한 곳은 편안하고 안전하고 늘 비슷한 생각에 머물게 한다.

그러다 낯선 곳, 해남으로 이동한 것은 불편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여행과 같다. 오랜만에 떠난 여행에서 나는 새로운 풍경과 사람, 음식을 만나며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트럭은 호박을 싣고 달린다. 잘 쌓아 올린 호박은 트럭 적재함 크기의 서너배나 된다. 트럭이 모퉁이를 돌 때면 둥근 호박이 와르르 쏟아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몸이 긴장된다.

돌담을 쌓는 기술을 가진 장인이 사라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어떤 접착제도 쓰지 않고 돌로만 쌓는 돌담, 잘 쌓아 올린 호박을 보며 그들을 떠올린다. 늦가을 해남에서 흔한 풍경, 신기한 모습이다.

이 많은 호박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서울 가락동시장 같은 곳으로 가겠지. 그런데 어디서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이 궁금증은 다음 해 가을에 해남 송지면 바닷가를 달리며 풀렸다.

송지면은 땅끝마을이 있는 해남의 남쪽이다. 그곳에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호박밭이 장관이다. 길 양쪽으로 둥근 호박이 늘어서 있다.

돌탑처럼 몇 개씩 포개 올려 쌓아 일광욕하는 호박밭에 늦게 핀 노란 호박꽃이 별처럼 박혀있다. 호박은 효자 상품이다. 노인이 대부분인 농촌에 일 할 사람은 부족한데, 호박은 심으면 그 자리에서 넝쿨을 뻗으며 풀 속에서도 잘 자라고 큰 열매를 준다.

물론 돌보면 더 많은 수확을 하겠지만 나 같은 초보 농사꾼도 거의 실패하지 않는다. 풀만 무성한 곳에 들어가 살펴보면 그 안에 풀과 사이좋게 자라는 호박을 찾을 수 있다.

호박은 시골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우리집 언덕에도 있고 이웃집 밭 한 켠에도 노란 꽃을 피우며 당당하게 자란다. 그 흔한 호박이 해남에서 내 마음에 들어와 그림에 자리 잡았다.

지난해 여름부터 책을 만들자는 계획에 돌입했다. 코로나 19로 항공료 거금을 날리며 태국 워크숍과 여행을 취소하고, 바깥출입을 자제하는 겨울, 쌍달리 산골에 은둔 아닌 은둔을 하며 열여섯 번 교정과 주변의 도움으로 책이 나왔다.

작업실만큼 갖고 싶었던 책이다. 그림 중에 지난 이십 년 동안 작업한 200여 점을 골랐다. 이미 나를 떠나 다른 곳에 가 있는 그림도 꼽아보니 꽤 많다. 첫 출판의 기분을 묻는 지인에게 부끄럽다고 대답했다.

내 속을 모두 드러낸 것 같은 부끄러움, 창피함. 오류도 눈에 띄고 부끄러운 마음이지만 한 달여 지나니 이제 뻔뻔해져서 주변에 알리며 책 주문하라고 압력을 가한다. 책을 출판하며 그림과 자료를 정리하며 분주한 봄이다.

가수가 노랫말처럼 된다더니 화가도 그림처럼 되나 보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서로 돕고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편집자 주)
화가 안혜경의 30여년 작업에 대한 결과물, 200여점의 그림들이 모여 책으로 나왔다.
한국현대미술선 46, 안혜경 <헥사곤출판사>
인터넷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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