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5

도청소재지로서 여관이 흥행

관광도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업종은 바로 숙박업이다. 특히 우리 지역 공주처럼 오랜 역사문화를 바탕으로 관광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곳에서는 좋은 곳을 보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은 많을수록 좋다.

몇 년 전부터 공주에 세운 한옥마을을 비롯해 하숙마을, 게스트하우스, 펜션 등 못 보던 숙박시설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만큼 공주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니 더할 나위 없이 반갑기만 하다.

공주에는 100년 전 그때 그 시절에도 이름난 여관들이 즐비하였다. 그러나 지금과는 다른 이유에서 여관들이 생겼다. 충남도청의 소재지로서 공주에 사회적, 경제적인 기능이 집약되었기 때문에 각 지방에서 올라와 숙박하는 관리나 민간인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공주고등보통학교나 공주사범학교, 공주고등여학교 등 명문 학교가 많았던 공주는 학교 입시 기간이 되면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많아 여관마다 빈방이 없었다.

어떤 때는 이러한 호기를 노려 일반 여염집에서 하숙을 쳐 손님을 가로채면서 여관 업주들과 다툼이 발생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 일제강점기 상반여관 사진엽서(출처: 일본 이와테현 사이토마코토기념관)

일본인 여관은 도청대로에, 조선인 여관은 본정통에

당시 여관은 주로 본정(本町), 지금의 중동 대로변 주변으로 자리하였다.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은 상반여관(常盤旅館)과 하야여관(河野旅館)이 있는데, 도청과 가까운 도청대로 주변에서 큰 요리점과 인접하여 자리 잡았다.

상반여관은 지금의 진흥각 뒤편에 있었는데 공주에서 가장 크고 이름나 있어 공주를 방문한 고위직 관리들이나 각종 견학단, 시찰단들이 머물기도 하였다.

특히 상반여관은 공주를 홍보하는 엽서로 만들어질 정도로 꽤 유명하였다. 하야여관도 유명하였는데, 조선자동차운수주식회사의 본점지인 공주에서 총회를 개최하기 위해 각 지역의 지점주가 하야여관에 모이기도 하였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여관은 도청과는 조금 먼 작은 사거리와 큰 사거리 사이에 모여 있었는데 공주여관(公州旅館), 대성여관(大成旅館), 동아여관(東亞旅館)이 있었다. 이외에 도립공주의원 옆에 있던 동양여관(東陽旅館)도 있었다.

이 여관들은 당시 큰 이슈를 불러온 맹휴운동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는데, 1927년 공주고등보통학교 4학년 학생들이 일본인 교장에 맞서 동맹휴교운동(同盟休校運動)을 벌이고자 여관에서 진정서를 만들었다.

잘나가던 여관들은 1932년 도청의 대전 이전을 계기로 큰 타격을 입었다. 도청 이전 직후인 그해 10월 공주의 여관 및 요리점을 상대로 약 10일간의 운영실적을 1년 전과 비교하여 조사한 결과, 수요자가 줄면서 음식값이나 투숙객은 약 3분의 2로 줄었다.

특히 당시 여관들은 자동차 수송도 병행하였는데 이용자가 절반으로 극감하는 가운데 대전-공주 간 이용자는 증가하였다.

충남 제일의 여관 – 동명여관(東明旅館)

모두가 어려웠던 1950년대 보릿고개 시절, 공주에 소위 잘나가던 공주의 여관이 있었는데 그곳은 ‘동명여관(東明旅館)’이다. 동명장이라고도 불렸던 동명여관은 지금의 중동 이학식당 골목에 있었다. 그곳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하야여관(河野旅館)과 요정 금월(錦月)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여관은 공주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점점 묻혀 사라지고 있지만, 1958년 충남 여관업 경진대회에서 대전, 온양, 유성 등 대도시의 여러 큰 여관을 물리치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근방에서 모르는 이 없는 유명한 여관이었다.

이 여관의 주인은 이병도(李炳道) 씨다. 1958년 당시 68세의 나이로 여관 경진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그의 성공스토리가 동아일보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이병도 씨는 천안 직산이 고향인 사람이다. 여섯 살 되던 해에 부친이 죽고, 외동아들로 홀어머니를 모시며 지냈는데 그 생활은 늘 넉넉하지 못했다.

▲ 동명여관 안뜰에 서 있는 주인 이병도(출처: 『동아일보』 1958. 11.29 기사)

11살 어린 나이에 그는 석유를 조금씩 떼다 팔았는데, 판매방식이 무척 남달랐다. 맥주병 한 병에 1전씩 받되, 서비스로 석유 ‘등잔’과 ‘램프’의 ‘호야’를 무조건 몇 개든지 닦아 주는 것이었다.

석유 장사를 돈벌이로 하여 먹고 입는 것이 해결되자, 16세에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을 깨닫고 글을 배우려는 욕심으로 군청의 사환으로 취직하였다. 이것도 램프 소제로 군청을 드나들 때 담당 관리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21세가 되던 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하여 드디어 당시 도청이 있던 ‘공주’로 왔다. 천안에서 조치원을 거쳐 공주로 온 그는 금강 변 장기대 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넜는데, 2전의 나루 삯이 없다는 것을 안 나룻배 주인이 분풀이로 이 씨의 두루마기를 강물에 던져버리는 수모를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주에 들어온 이 씨의 눈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반여관’ 이었다. 처음으로 대하는 화려한 집 구조를 놀라움에 가득 찬 눈으로 보면서 이 씨는 반드시 이보다 훌륭한 여관을 경영하겠다는 평생소원을 세우고, 그 여관의 잡부로 일을 시작하였다.

이후로 이 씨는 도청의 소사, 석판인쇄 직공, 자동차 운전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돈을 차곡히 모았다. 39세 때 초가집 한 채를 사 식료품 상점을 시작했는데, 이때도 어떤 물건을 사는 손님에게 반드시 물건을 배달하여 주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

여기서 모은 돈을 가족 몰래 뒤뜰 항아리에 차곡차곡 모았다. 그러기를 약 12년, 이씨가 51세 되던 1941년 어느 날 식료품점을 판 돈까지 모두 합해 드디어 여관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명여관이다. 그 옛날 이 씨가 잡부 노릇을 하였던 일본인 경영의 상반여관보다도 더 훌륭한 여관이 준공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 폭격으로 유일한 재산인 여관이 완전히 불태워져 송두리째 앗아갔다.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깊이 좌절했지만, 다시 일어선 이 씨는 61세의 나이에 지방으로 다니며 ‘개’를 손수 사서 직접 자기 손으로 ‘개장국’을 끓여서 잿더미 여관 터에 막을 치고 팔기 시작했다.

그렇게 재개하여 약 85평의 동명여관을 재건하고 해마다 증축하며, 단 하루도 손님이 있거나 없거나 목욕물을 데우지 않은 날이 없었다.

365일 1년 어느 날 어느 시각에 찾아온 손님이나 즉시로 목욕할 수 있는 준비를 하여 둔 것이 이 씨의 자랑이었다고 한다. 공주사람들의 기억에 의하면 동명여관은 1980년대 초반까지 운영되었다고 한다.

(작성자 : 공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고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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