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6

인류가 지금까지 발명한 여러 이동수단 중 가장 건강한 이동수단은 단연코 ‘자전거’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우리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는 이때, 자전거 타기는 나의 건강을 지키는 방법 의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이번 아카이브로 보는 공주 이야기는 이 자전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우리나라 자전거 역사의 시작은 1800년대 후반 조선말 경이다. 서양 신문물에 일찍 눈을 뜬 개화파 인사들이나, 파란 눈을 가진 서양의 선교사들, 일찍 개화의 문을 연 일본인들에 의해 우리나라에도 자전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자동차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하였기 때문에 전파 속도가 빨랐던 자전거는 일반 서민들의 다리가 되어 일상 속에서 빠르게 자리 잡아 갔다.
  
공주의 자전거 전문상, 농천상점(瀧川商店)

일제강점기 공주에도 여러 자전거 점포들이 있었다. 1926년 공주시가도에 보이는 자전거점은 옛 공주경찰서 앞(현 공주문화원 옆)에 있던 하타노(ハタノ)자전거점, 본정의 공주공립보통학교(현 중동초등학교) 부근 부근에 있던 선광(鮮光)자전거점, 그리고 조선식산은행 공주지점 맞은편에 있던 농천상점(瀧川商店) 공주지점이 있다.

특히 농천상점은 1907년부터 경성의 명치정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일본인 타키가와 시즈에(瀧川靜江) 소유의 상점이다. 이 상점은 통포화약(銃砲火藥)과 자전거를 함께 취급하는데, 타키카와는 당시 질 좋은 자전거를 싼값에 많이 파는 ‘박리다매’ 형식의 판매 방법을 주로 사용하며 높은 신용도를 바탕으로 동일 업계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개업 당시만 해도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 적었으나, 점차 그 수가 늘어나면서 농천상점은 경쟁의 중심에 섰다. 마침내 상점이 성장하며 1914년에 이르면 조선 내 각 지역의 총괄 지점을 대전과 공주에 두었고, 대전은 동생인 타키가와 이치에(瀧川一江)에게 맡기고, 공주지점은 오오니시 코우키지(大西幸吉)에게 감독을 맡기며 상점을 운영하였다.   

▲ 1926년 공주시가도에 표기된 농천상점 공주지점의 옛 모습

공주고보생 자전거를 타고 인천 산업박람회장까지

공주의 자전거 역사는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공주는 도청소재지로서 도시문화가 발달하고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빨라 자전거의 도입도 빠르게 진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전거는 공주 사람들이 읍내에서 짧은 거리를 오고 가는 일상 속에서 많이 이용되었을 테지만, 멀리 장거리를 이동할 때도 자주 이용되었다. 가까운 대전을 소위 ‘볼일 보러’ 자전거로 방문하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었다.

한편, 자전거로 유람하는 것도 종종 있었던 일이다. 1925년 4월 공주 군민 80여 명은 고적탐승단을 조직하고 부여 팔경과 고적을 답사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유람하였다. 또 같은 해 5월에는 공주 유지 및 청년수양회의 후원으로 계룡산 탐승운동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자동차대, 자전거대, 도보대, 경주대 등 4분대로 각각 나누어 자전거 분대는 계룡산 갑사를 탐승하고 1등부터 3등까지 도착순으로 순위를 매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보다 더한 일도 있었다. 1935년 5월에는 지금의 공주고등학교인 공주고등보통학교 170여 명의 3∼4학년 학생들이 인천에서 열린 조선산업박람회를 견학하고자 참여한 일이 있었다. 이때 공주에서 인천까지 자동차만 타고 간 것이 아니라, 새벽 3시 반에 도보대와 자전거 분대로 나누어 출발하였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갑사까지 간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늘, 타지역 학생들이 수 백리를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오는 그 모습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신문에도 보도가 되었을까. 그 여정이 공주에서부터 계속 자전거로 갔는지, 개경까지는 기차를 타고 그다음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열정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공산성에서 열린 전국자전거경기

사실, 그 시절 자전거 열풍의 원인은 ‘자전거 경주’에 있었다. 서양에서 자전거가 지금의 모습과 같이 발전하게 된 계기도 바로 경주에서 우위에 점하기 위해 문제점을 개선하면서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강점기 자전거 경주가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자전거 왕 엄복동(嚴福童)’이다. 일제의 억압에 엄복동의 승리는 조선인에게 한 줄기 희망과 같은 것이었다. 엄복동이 자전거 상인들이 주최한 자전거 경주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자주 출전하였던 대회는 전국 규모의 ‘전조선자전거경기대회(全朝鮮自轉車競技大會)’이다. 1913년 4월 서울 용산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약 1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22살의 조선인 엄복동이 일본인을 따돌리고 우승하였는데, 이후 이 대회는 억압받는 민족의 긍지를 심어줄 수 있는 상징처럼 여겨져 회를 거듭하며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우리 지역 공주에서도 이 대회가 열린 것은 1939년과 1940년 딱 2번이다. 모두 산성공원, 즉 지금의 공산성 쌍수정 앞 추정 왕궁지에서 열렸다. 지금의 공산성은 백제의 왕궁지로써 세계유산으로 지정이 되는 영광스러운 역사의 현장이기에, 그곳에서 자전거 대회가 치러졌다는 것은 공주 사람이 아니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사적지를 공원화하는 식민지 정책이 수립되며, 공산성에는 벚나무가 식재되며 그 이름도 ‘산성공원’이라 격하되었다. 그리고 쌍수정 앞 왕궁지는 ‘산성공원 대운동장’이라 불리며 공주 관내 기관의 문화행사나 학교의 체육행사가 실시되었다.

첫 번째 열린 자전거 대회는 1939년 4월 26∼27일까지 양일간에 걸쳐 열렸다. 당시 공주에는 동아일보 공주 지국이 있었는데, 이 대회를 주최하였다. 당시 지국장이었던 공주 유지 지헌정(池憲正)이 개회사를 마치고, 전국에서 모여든 남녀선수들이 정정당당한 경기를 다짐하는 선서를 하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경기를 보러 온 공주사람들로 공산성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박수갈채가 끝날 새가 없었다. 당일 남자부 1류 우승자는 평양에서 온 김운학이었으며, 2류 우승자는 대구에서 온 이봉득, 3류 우승자는 조치원에서 온 장금종 이었다. 그리고 여자부 우승자는 군산에서 온 이복순이었다. 특히 여자부에서 공주 출신의 이경숙이 2등이라는 아쉬운 결과가 나왔으니, 당시 공주사람들의 응원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상상이 된다. 이때 공주의 김영희도 4등을 하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 동아일보 공주지국장 지헌정의 아들 故 지인준이 소장하던 사진으로 1939년 산성공원 대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자전거경기대회의 모습(공주학연구원 소장)

전국자전거대회는 이듬해에 연이어 또 공주에서 열렸다. 예년의 성공개최에 힘입어 딱 1년 만에 열렸는데 이번에는 조선일보사 공주지국이 주최하고 공주청년단과 경성양복점의 후원으로 4월 28, 29일 양일간 열렸다. 마찬가지로 산성공원 대운동장에서 경기가 운영되었고, 역시 수많은 관중들의 열띤 응원 속에 선수들이 경기해 냈다. 이날의 성과는 실로 대단하였는데, 바로 여자부의 1등 유춘홍, 2등 권설죽매, 3등 황금자 이 세 사람 모두 공주 사람이었던 것이다! 분명 공주사람들의 대환호가 공산성을 가득 메웠을 것임이 틀림없다.

한편 이 시기에 자전거 왕 엄복동은 아쉽게도 공주에 오지 않았던 듯하다. 엄복동이 공주에 왔다면 신문마다 대서특필 되었을 것이나 기사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정식 은퇴를 한 이후에도 전국에서 이 대회가 열릴 때면 종종 노년부에 출전하여 실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는데, 2번 열린 대회 모두 공주를 방문하지 않아 사람들의 아쉬움이 무척 컸을 것이다. 그러나 두 대회 모두 공주의 여자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 주어 이날의 성적과 승리는 공주 사람들의 기억에 깊게 남았을 것이다. 

(작성자: 공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고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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