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7

공산성 제일 전경지, 공산정

공주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호인 공산성! 그야말로 백제 때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공주의 오랜 역사가 집약된 곳으로 예나 지금이나 공주사람들의 큰 자긍심으로 다가오고 있다. 풍부한 역사자원도 자긍심의 원천이겠지만, 금강과 어우러져 나오는 절경은 그 옛날 옛 선비들이나 지금의 사람들에게나 장문의 탄성을 불러온다. 특히나 공주를 방문하는 외지인에게 공주 나들목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맞이한 공산성의 절경은 그야말로 공주 여행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려 줄만 하다.

공산성에 자랑할 곳도, 가볼 곳도 너무 많아 열 손가락이 모자를 정도라 하겠으나 여행객들에게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핫플레이스는 지금의 공산정이 아닐까 한다. 공산정에 오르면 동쪽에서 흘러오는 금강의 물줄기가 멀리 한눈에 보이고, 북쪽으로 공주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신시가지, 서쪽으로 제민천 하류 부근에 형성된 원도심과 멀리 뾰족하게 솟은 연미산의 모습까지 사방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다. 발아래로 공주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금강교가 늠름하기만 하다. 또, 해가 지고 석양에 어둑해져도 공산성과 금강, 그리고 공산정이 만든 한 폭의 그림은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오늘은 이 공산정, 그 터에 담긴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공산정의 옛 이름은 유신각(維新閣)

공산성의 서북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2층 규모의 공산정(公山亭), 그 이름은 공주 시민에 의해 지어졌다. 2009년 당시 특별한 이름 없이 공산성 전망대 등의 이름으로 불리자, 공주시에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정각의 이름 공모사업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공산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공산정은 언제 세워진 것이고, 그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공산정 입구 안내판에 살펴보면 공산정이라는 이름을 갖기 전, 이곳은 유신대(維新臺) 또는 전망대 등으로 불려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몇몇 공산성 문화재 수리보고서나 단행 도서에는 유신각(維新閣)이라고도 표기하고 있으니, 공식적인 명칭은 유신각이라는 이름이 더 정확할 듯하다. 특별한 이름이 없는 전망대는 차치하더라도, 유신대·유신각이라는 이름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유신(維新)’이라는 두 글자를 통해 우리는 그 유래를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즉, 유신각은 故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선포를 한 1972년 10월에서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 10월 사이에  초헌법시대인 ‘유신시대(維新時代)’와 관련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5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역사를 가진 공산정이 공산성에 있는 쌍수정, 광복루, 공북루, 진남루처럼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건립연대를 찾기란 매우 힘들었다. 아마도 유신각이 유적 복원도 아니고, 최근에 세워진 건축물이기에 1980년대 공산성 문화재 정비복원 보고서에서도, 공주시군지에서도 집중조명하고 있지 않았던 듯하다. 또 공주사람들을 토대로 기억을 되살펴 물어보아도, 기억이란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기 마련, 정확한 시간을 찾기란 더욱더 어려웠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유신각은 1973년에 세워진 것이 아닐까 한다. 공주학아카이브 사업을 통해 수집한 1973학년도와 1974학년도 공주사범대학 졸업앨범에 보면 공산성을 배경으로 찍은 졸업생들의 추억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두 사진을 비교해 보면 공산성의 북서쪽 성벽 가장 높은 곳에 1973년도 졸업앨범에는 없던 유신각이 1974년도 앨범에는 보인다. 즉, 이것은 사진 촬영을 한 1972년에는 없던 누정이 1973년에는 건립되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선포를 하였고, 1974학년도 졸업앨범에는 유신각의 모습이 보였으니, 유신각의 건립에 대한 합리적인 시간은 1973년이 되지 않을까.

▲ <누정이 없는 1973학년도 앨범사진(좌)과 유신각이 있는 1974학년도(우) 앨범사진>

사실, 1963년 1월 공주의 송산리고분군, 갑사 철당간 지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중동 석조 등과 함께 공산성이 문화재(사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그 이후, 1969년 5월부터 청와대 비서실이 대통령에게 공산성의 활성화를 건의하기 위해 항공사진을 촬영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니, 당시 대통령에게 공산성 현지 상황이 잘 전달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1971년 5월 공산성이 한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선정되어 개발계획에 착수되었고, 하늘이 도왔는지 두 달 뒤 여름 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었으니 공주는 그야말로 공산성과 무령왕릉 등 역사유적지를 바탕으로 관광 개발의 정당성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결국, 1973년 9월 전국에 5개 관광벨트 조성지로서 서울~온양~공주~부여를 잇는 그 과정에서 공산성에 유신각이 건립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에도 그 자리에 정자가 있었다?

공산정이 세워진 공산성의 절경은 빼어나기로는 가장 으뜸이기에, 그 자리에는 예부터 이름난 누정들이 역사 속에 남아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누정으로는 금강루(錦江樓)가 있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누정으로 조선 건립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이나 단종조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 성종조 문예가로 이름난 이승소 등이 금강루를 노래한 명시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또, 공산성 공북루 앞에 있던 조선시대 중군영에 소속된 건물의 하나였던 후락정(後樂亭)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1859년(철종 10) 간행된 『공산지』 2권의 진보조(鎭堡條)에 보면 중영(中營)의 소속 건물로 10칸 규모의 후락정을 포함하고 있다. 공산지 서두에 기록된 공주목지도에도 후락정의 위치를 서문과 중영의 사이 공산성 절벽 부근에 표시한 것만 보아도 지금의 공산정 부근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금의 공산정 자리는 오랜 시간 동안 각기 다른 이름의 누정이 존폐를 반복하며 역사를 만들어나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도 이 부근에 이름 모를 누정이 한 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누정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배다리(주교)의 모습이 담긴 사진엽서이다.

▲ 공산성 성벽 서쪽 부근(엽서 중앙)에 누정이 없는 금강교 배다리시절 엽서(출처: 천안박물관)

▲ 공산성 성벽 서쪽 부근(엽서 우측)에 누정이 있는 금강교 배다리시절 엽서(출처: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위의 두 사진엽서는 배다리 형태의 금강교 모습으로 1930년 9월 금강 북단 다리 부근에 터닦이 공사를 하고, 야간통행의 편의를 위해 가로등도 설치했던 모습이다. 당시 이 배다리는 공주사람들이 금강을 쉽게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로 1933년 11월 철교 형태의 금강교가 준공되기 이전까지 사용되었다. 엽서 속 배다리의 모습은 비슷한 시기의 모습이나, 하나 다른 것은 우측 성벽 서쪽 부근에 세워져 있는 정자의 유무이다.

이처럼 하단 엽서 속 모습과 같이 분명 지금의 공산정 부근에 누정이 하나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 누정의 이름이 무엇인지, 건립시기는 배다리에 가로등이 설치 운영 되었던 1930~1933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하게 언제 건립된 것인지, 또 언제 사라진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공산성을 공원화하는 과정과 깊은 연관성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산성공원에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도로정비를 하고, 문화재에 대한 정비가 지속해서 이루어져 왔다. 특히 1932년 8월에는 충남도청 이전 후의 공주 갱생을 위하여 중요시설 중의 하나인 공산성에 도로 공사 뿐 아니라 공산성 오대누각 수선이라 하여 쌍수정, 쌍수산성기념비각, 진남루, 웅심각(지금의 광복루), 공북루 등을 동시에 정비하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도 산성공원을 공원화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공산정 자리에 휴락의 공간인 누정 한 기가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성자: 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고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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