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금의 가치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웬만한 마음먹고 살 수가 없다.

한 돈에 거의 8만 원대에 육박하고 있다.

금값이 비싸다하니 금을 캘 수 없을까하는 공상도 해보게 된다. 나의 이런 마음을 이인면 복룡리 답사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이인면 복룡리에는 금을 캐던 금광이 남아 있다. 일명 ‘이인금광’이다. 지금도 이인면 복룡리에 금이 묻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인면지(2005)에 의하면 1943년 총독부가 강제로 금광을 폐쇄하면서 광권자에게 보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살펴보면 복룡리 뒷내 금광을 '이인금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인금광은 이미 1890년대 광업권 등록을 마쳤고 최종 광업권자는 조선광개발(주)(광업자 하인화)로 1967년까지 오랜 기간 금을 생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생산량은(단위 : Au 99.9%, g)은 1936년 금 10,732g, 은 2,964g, 1946년 8.457g, 1941년 95.108g, 1942년 156,205g으로 점차 증가하였다. 광맥 수는 7개맥으로 연장 250m, 300m, 맥폭은 0.6m정도였다.

금광 개발이 한참 활발할 때에는 700~800명이 이곳으로 몰려와 사무실, 도강장, 제련소, 화약고 등에서 일을 하였으며, 가까운 마을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주야로 금을 캐면 1관 정도를 캤고 요즈음도 가끔씩 채취할 수 있다고 한다. 8·15 해방이 되면서 김영배 씨가 광산을 완전 임대를 해서 6·25전쟁 때까지 금을 채취하였다고 한다. 50년대에는 각지에서 광객들이 모여들어 도강도하고 제련도하여 돈을 벌은 사람도 있었으나 실패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인금광에서 광구를 두개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입구가 붕괴되어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들어가 보았다. 하나는 레미콘 ‘다음 산업’ 뒤에 있으며 또 하나는 ‘(주)광풍’ 앞 도로를 지나서 있다. 전자는 약 10m까지 들어갈 수 있었으나 붕괴의 위험 때문에 입구에서 조금만 들어가 보았다. 후자는 입구가 거의 붕괴되어 차단되어 있지만 약 3m까지 들어갈 수 있는데 쓰레기로 입구가 막혀 있다.

당시 광산에서 일을 하고자 광천에서 이곳으로 남편을 따라 이사 왔다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으나 “광산 이야기는 하지를 마”라는 말에 한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지금까지 광업에 종사했던 남편이 돌아가신 후, 홀로 살고 있다. 또 한 분은 백정자 마을에 살고 있는 엄태병씨다. 엄태병씨는 이인광산에 대해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인 광산’이라고도 불렀지만 ‘고부내 광산’이라고 더 많이 불렀다는 것이다. 지금의 레미콘 공장을 건립하기 전에는 금광에서 캐낸 돌덩어리가 이곳에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 돌들을 공주-부여간 도로포장공사로 대부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일이 끝난 광부들이 한잔 마시기 위해서의 뒷내 주막을 찾았으나 월급날에는 이인 면소재지에 나가 거나하게 마셨다는 것이다. 흥청거리는 이인의 달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엄태병 씨의 이야기를 토대로 금의 채취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말감법’으로 암석을 미세한 가루로 만들어 물을 혼합시켜서 진흙상태로 만든 후, 수은을 첨가하여 금을 채취하였다는 것이다. 금은 수은과 혼합하여 아말감이 되고, 열을 가하면 수은이 증발되어 금이 남게 되는 원리이다. 이런 아말감법으로 광석 중의 70% 정도의 금을 채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는 “시방도 일을 하면 금은 나오지 다른 일 하냐고 안 해서 그러지” 라고 하면서 이인 금광에 대한 아쉬움을 더했다.

이인 복룡리에는 금이 묻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금을 찾아 광천, 조치원, 부여 등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듯이, 공주의 진정한 금을 찾아 사람들이 몰려왔으면 좋겠다. 이제 민선4기 시대가 열렸다. 때를 같이하여 금강뉴스시대도 열렸다. 공주에서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공주에 묻힌 진정한 금도 캐야하고 역사도 캐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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