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10경’이라는 것이 예로부터 전해오고 있다. 아마 ‘공주 10경’이 있다는 것을 아는 분은 많이 있겠지만, 정작 그 10경의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하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공주 10경’에는 서거정(1426-1488)의 공주 10경과 신유(1610-1655)의 공주 10경, 두 가지가 있다.

서거정과 신유의 공주 10경

우선 서거정의 공주 10경을 열거하면, 금강의 봄 뱃놀이, 월성(산)의 가을 흥취, 곰나루의 밝은 달, 계룡산의 한가한 구름, 금강루의 송객(送客), 정지사의 스님을 찾아서, 삼강(三江)의 푸르름, 금지(金池)의 연꽃, 석옹(대통사 석조)의 창포, 다섯 고개의 푸른 봉우리 등이 그것이다. 각 경치마다 시가 지어져, 가령 <곰나루의 밝은 달>시는 다음과 같다.

곰나루의 맑은 물 일렁이는데/ 어느 사이 밝은 달이 떠올랐는가/ 백제 옛 역사, 나는 새처럼 지나갔으나/ 달에게 물어보면 달은 응당 알리라/ 한번 누선(樓船) 위로 학을 타고 오고부터/ 백제 사직 황폐하여 당나라 땅으로 변했네/ 낙화암 앞 봄 경치 보고 탄식하는데/ 조룡대 아래로 물결이 돌아드네. 

한편 2백년 뒤 신유가 다시 읊은 공주 10경은 동월명대, 서월명대, 정지사, 주미사, 영은사, 봉황산, 공북루, 안무정, 금강나루, 고마나루 등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봉황산 시는 이렇다. 산봉우리에 오동과 대나무 함께 짙푸르고/ 무성한 열매가 긴 줄기에 달려 있네/ 황패 같은 명관이 고을을 다스린다면 / 천길 대나무에서 내려온 봉황의 비상을 보리라.

10경의 작자 서거정은 15세기 조선을 풍미한 대표적 문인으로 공주 이외에도 8도 여러 지역의 8경, 10경, 12경 시를 다작(多作)한 인물이고, 역시 당대에 문명을 날렸던 17세기의 신유는 공주에 현감으로 부임한 것을 인연으로 새로운 10경시를 선보였던 것이다.

이들 예전의 공주 10경을 검토해보면, 이것이 지역민들의 공감대를 토대로 한 객관성보다는 작자의 개인적 관점과 주관에 의한 것이라는 점, 구체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이고 막연한 개념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점, 시작(詩作)의 소재로서 선정되고 있다는 점 등 몇 가지 특징들이 확인되고 있다.

더욱이 이들 10경 가운데는 이제 그 장소를 알지 못하거나 그 대상이 이미 사라져 없어져버린 것도 적지 않다. 비교적 구체적인 신유의 10경을 보면, 10경중 동,서 월명대와 정지사, 주미사, 안무정, 금강나루 등 6건이 이미 기능을 상실하거나 장소를 알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보면, 왜 공주에서 공주사람들이 공주 10경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하는 이유를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공주 10경’은 처음부터 객관성에 기초한 ‘공주 10경’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지역민의 공감대가 희박한 묵객의 문학적 작업의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위에 인용한 서거정의 곰나루 시에서, 아연 무대가 낙화암과 조룡대로 ‘비화’하는 것만 보더라도 이같은 과거 10경시의 한계점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공주 10경 다시 만들면 ?

  공주에는 많은 승경과 유적이 있어서 이를 자원으로 하는 관광공주의 경영이 요구되고 있다. 5백년 전, 3백년 전의 공주 10경은 소재의 시의성이 이미 상실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공주 10경’이라는 그릇만은 다시 쓸만한 것으로 생각된다.

새 공주 10경 콘텐츠의 개발이 가능하다면, 이를 통하여 관광공주의 새로운 소재 개발이 이루어지고 효과적인 홍보 방안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관광만이 아니라이 새 10경은 학교교육의 지역교재로서도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주 ‘신10경’은 그 대상이 구체적인 승경이면서도 공주를 상징하는 의미 있는 공간이어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공주 시민들의 공감으로부터 나온 10경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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