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자랑거리로 ‘따뜻한 인정’이 손꼽혔다. 예컨대 ‘이웃사촌’끼리는 애환을 같이 하며 피붙이 못지않은 정을 나누었고, 같은 동네는 물론 인근 마을 혼상례까지 나의 일을 젖혀놓고 함께 모여 치르는 게 상례였다.

좀 거슬러 올라가면,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저녁 무렵 생판 모르는 사람 집에 찾아가 ‘하룻밤 유숙하고 갑시다.’했을 때 대개 아무 조건 없이 잠자리와 끼니를 제공해 주는 게 보통이었다. 만약 그런 나그네를 매몰차게 물리치면 인정머리 없는 집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인근 마을은 고사하고 같은 마을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같은 아파트의 앞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관심을 가져 보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이웃에 사람이 죽어 누워 있어도 며칠이 지나도록 모르는 세상이다. 남아서 내다버리는 음식이 지천인데 없어서 굶는 사람이 바로 이웃에 있다. 살벌하다. 참으로 살천스럽기 그지없는 세태다.  

우리가 비록 경제적으로는 보릿고개를 넘어서 선진국에 다다랐다고 자부하지만 삶의 윤기나 행복 지수는 많이 후퇴한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흔히 추억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동안 우리는 ‘잘 살아 보자’는 구호를 외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왔다. 원칙은 외면당하고 실종됐다.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정해 놓은 수치 달성에만 매달려 왔다. 어떤 학자의 표현대로 ‘걸인의 철학’에 모든 것을 건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총체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부딪쳐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화두는 단연 ‘변화와 개혁’이다. 무엇을 위한 변화와 개혁인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한다. 그를 위해 우리 삶의 모든 면에 경쟁과 효율이 강조된다. 경쟁에서 도태되어 낙오되는 건 능력 부족 때문으로 치부된다. 효율이 없는 것은 아무 쓸모도 인정받지 못한다. 개인 기업에서 국가기관에 이르기까지 경쟁이 일상화되어 있다. 기관끼리, 개인끼리 바라보이는 모두가 경쟁자이자 적이다.  

경쟁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평가를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전방위로 평가가 만연한 세상이 되었다. 어디로 눈길을 돌려도 온통 평가뿐이다. 심지어는 평가를 위한 평가까지 있다. 평가만능주의, 평가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발전을 위해 평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평가 결과의 활용을 어떻게 하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평가를 오로지 서열을 매기는 것으로 보는 것은 야만이고 폭력이다. 강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약한 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전형적으로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거기에 인간은 없다. 약자에 대한 배려도 없다. 오직 동물세계의 냉엄한 법칙만이 있을 따름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위엄은 실종되고 효율과 경쟁만 있을 뿐이다.

 이런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우리 사회를 점령한 지도 꽤 되었다. 당연히 진리와 정의의 보루라는 대학도 예외 없이 이 괴물에 완전히 점령되어 버렸다. 대학평가, 학과 평가, 교수 평가가 일상화되었다. 평가 결과에 따라 우수 대학, 우수 학과, 우수 교수가 가려진다. 거기에 돈도 따라다닌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받는 것은 누구도 시비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질을 따지지 않는 양 위주의 연구 실적, 벌건 도장이 찍힌 봉사활동확인서, 학생들의 비위를 맞추고 받은 강의 평가 등이 과연 우수 교수를 판별하는 기준에 적합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행복의 조건으로 ‘지혜’를 꼽는 학자가 있다. 그것은 대학 생활에서 공부해야 할 핵심 주제라고 생각된다. 훌륭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경쟁해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기보다 지혜를 얻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교수가 단순한 지식 기능공이나 지식 장사꾼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많은 ‘훌륭한 교수’를 강제로 ‘우수 교수’로 몰아가는 신자유주의 대학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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