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를 꽉 메워 놓은 듯 자리를 잡고 있는 자동차, 노점상, 파라솔......

주차장에 세워 놓고 걸어가려다 오늘은 몸살 기운이 있어서인지 꾀가 나서 차를 타고 매장까지 가려고 시장길로 들어섰다. 시장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후회가 막급이었다. 항상 느끼고 생각되었던 것이건 만...

필자는 시장의 도로 사정을 너무도 잘 알기에 가급적 차를 타고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도로를 꽉 막고 있는 차량과 노점들... 아니, 이제는 도로라고 말하기엔 지쳐버린 우리 모두들. 

언제부터인가 생계가 막막해져 한 푼이라도 벌겠다고 나선 노점상들을 이해하려 했고, 단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꺼려야 만 했다. 결국, 이제는 모두 이러지도 저러지도 어찌하지 못하며 너무도 안타까워 만 하고 있는 현실이다. 

오래 전부터 공주는 충청도 감영이 있었던 행정중심지로서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해 꽤나 번성한 모습을 보였다. 금강의 수계와 사통발달의 도로망 덕택에 개항이전부터 독자적인 ‘상품유통권’을 가진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이었다고 한다.

공주는 호서와 호남을 잇는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당시 공주에서 가장 상업이 번창했던 곳은 고마나루, 전막, 장깃대 나루(옥룡동 백제대교 부근)였다고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공주의 상권으로서 구한말에는 대통다리에서 현재의 우체국까지의 봉황산 쪽 제민천변까지가 공주시장(市場)이었으며 1918년 시가지 정비계획에 의해 공주갑부인 김갑순씨가 작은 사거리에서 큰 사거리에 이르는 제민천변을 매립하여 사설시장(중동 147번지)을 설립하였다고 한다.

1900년대 초반까지 열렸던 공주약령시는 대구약령시와 비견될 정도로 물동량이 많았다고 한다. 매년 봄 · 가을로 두 번씩 40여일 동안 열린 공주 약령시(藥令市)는 전국에서 몰려든 약재상들 때문에 여관이나 민박을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일제시기에 들어서는 거의 폐장(閉場)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봉황초등학교 부근 골짜기를 흔히 ‘약전골’이라고 부르고 ‘약령거리’라는 지명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공주시장은 큰 사거리에서 시내버스터미널까지 밀려나 있다.

그렇지만 약령시장이 있었기 때문일까? 유난히 공주시장에는 건강원, 한의원이 많이 보인다.
‘공주를 대표한 화려했던 공주 약령시장을 부활을 시킬 수 없는 것인가?’

또 한번 되 뇌이며 오랜 시간 막힌 길에서 고민에 빠졌다. 고민과 함께 차들이 서서히 소통이 되어갔다. 시장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위치도 바뀌는 것이다.

위치적으로 산성동으로 밀려 내려왔기 때문이었을까? 공주시장은 산성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서서히 바뀌었고 서서히 쇠퇴해지고 있다. 물론 지명은 계속 태어난다. 태어난 지명은 조금씩,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 계층에 따라 변모하는 생활에 얽힌 이야기들이 스며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름부터라도 ‘산성시장’이기보다는 공주를 대표하는 경쟁력을 갖춘 ‘공주시장(市場)’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공주시장(市場)이 되도록 또, 산성동 상인들은 물론이고 우리 공주시민 모두가 공주를 아끼는 성숙된 마음으로 공주경제 살리기에 동참해 주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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