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루베 후손의 백제기와 4점 반납으론 부족

충남 공주 송산리6호분의 도굴꾼인 카루베 지온. 송산리 6호분만이 아니라 남혈사(南穴寺)란 절 터 굴속에서 길이 7촌(약 21cm) 정도의 보살입상도 도굴하여 일본으로 빼돌린 교육자를 빙자한 백제고분 전문 도굴꾼으로 널리 알려졌다. 카루베 지온(輕部慈恩·1897~ 1970)은 일제시대 공주에서 교편을 잡은 교육자인 동시에 ‘백제 유물 약탈자’다.

그가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백제연화문 기와 유물 4점이 11월29일 공주로 되돌아왔다. 돌아온 유물은 1935년 카루베가 공산성에서 발굴했다는 것으로 연꽃무늬 백제기와 4점이다.

카루베 사후 그의 부인인 토시코(敏子)가 70년부터 나라 국립박물관에 기탁해왔던 것으로 KBS대전의 유진환 기자가 작년에 인터뷰한 이후 유족 5명이 모여 큐슈국립박물관장인 미와씨에게 상담한 결과, 미와씨가 “자매박물관인 국립공주박물관(관장 신창수)에 기증하는 것이 좋겠다”하여 기증이 이루어진 것이다. 유물은 완형 2점과 깨진 것 2점(서기 6~7세기)이며, 기증식은 29일 공주박물관에서 있었다.

호랑이가 먹이를 노리듯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카루베는 마침내 1933년에 송산리 고분군에도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마수로부터 각기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으로 밝혀진 송산리 제5, 6호분이 난도질을 당하고야 말았다.

오호통재라! 어찌 한낱 일본 도굴꾼에게 우리의 역사적 유물이 손때를 탔다는 말인가? 마치 오랫동안 정조를 지켜오던 숫처녀가 시정잡배 같은 무뢰한으로부터 강간을 당한 것처럼 파헤침을 당한 송산리5호, 6호분의 주인공들은 억울함과 함께 못난 후손들을 질책하며 한탄을 했으리라! 특히 무령왕릉과 비슷한 구조의 6호분은 사마왕의 첫 번째 부인이거나 동성왕릉, 또는 성왕릉으로 추정되는데 그 어떠한 유물에 관한 정보 하나 없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더냐?

필자의 추정으로는 무령왕의 첫 번째 대부인(왕비)의 능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송산리6호분 벽돌 중에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라는 문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양나라의 관청(궁궐)용 기와를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한편 무령왕릉 출토 벽돌 중에는 ‘□□사 임진년작(□□士 壬辰年作)’이란 문구가 들어 있는데 여기서 임진년은 서기 512년이다. 두 빈칸은 ‘와박(瓦博)’으로 추정되니, 와박사(기와 찍는 장인)가 임진년(서기 512)에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풀이된다.

벽돌을 구워서 만든 무덤임이 카루베 조사 때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미안했던지 카루베는 후일 송산리6호분을 발굴하고 보니,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고 발뺌하고 있었다. 하여튼 강경여고 선생을 하다가 일제가 패망하고 난 이듬해 카루베는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수많은 국보급 백제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린 채......,

이후 시즈오카현에 있는 니혼(日本)대학 교양부(현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지내면서 고고학을 가르쳤다 한다. 그곳 대학 창고에 연꽃무늬와 같은 백제기와 유물이 더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미와 큐슈박물관장은 말했다. 아울러 카루베의 제자인 현 일본 시즈오카 모처의 교장선생이 또한 그 비밀 중 일부를 알고 있을 것이라 전했다.

역사적 사건이기에 부언하면, 카루베의 유물 중 8궤짝은 강경의 제자인 한국인 임모씨(작고)에게 보관을 부탁했으나 돌려받지 못했다하며, 해방 후 부산항에서 가져간 유물 중에도 일부는 선적 검사 시 빼앗겼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송산리6호분 유물 중 일부는 한국 내에서 정확한 출처도 모른 채 팔려나갔거나 비밀을 간직한 채 누군가는 보관하고 있다는 얘기다.

74세인 문화재 전문도굴꾼은 한줌의 재가 되어 영원히 잠들었다. 만일 송산리6호분도 일제시대에 발견되지 않고 우리 손에 발굴되었다면 아마도 무령왕의 첫 번째 왕비릉으로 제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초라하게 카루베 자손이 보낸 백제시대의 4장의 연화문 기와가 아닌 찬란한 무령왕비의 모습으로 무령왕릉과 함께 백제의 웅진시대 모습을 제대로 알려줬을 텐데,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이제라도 카루베 후손들은 카루베가 행한 송산리 고분군 도굴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하고 그 전모를 밝혀줘야 한다. 아울러 가져간 유물 전량을 원래의 위치인 공주시에 반납해야할 것이다. 연꽃무늬 장식 기와 4장의 반환은 그 시작점에 불과하다. 모두 반납하지 않으면 송산리 고분군의 주인은 물론 무령왕과 백제 인들의 저주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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