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의 등장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송산리 6호분’이었다. 무령왕릉만 나오지 않았어도, ‘6호분’은 공주의 ‘백제왕릉’으로서 스포트를 여전히 받고 있을 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무령왕릉의 출현과 함께 6호분은 주연에서 조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연과 조연

1933년 세상에 알려진 6호분은 아직 그 피장자를 알지 못한다. 무령왕릉과 앞인지 뒤인지 하는 축조 시기의 선후관계조차도 모호하다. 그러나 무령왕릉에 못지 않은 규모의 유사한 벽돌 무덤으로서 왕릉에 없는 사신도의 벽화까지 장식되어 있어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6호분’을 등장시킨 것은 가루베 지온(경부자은)이었다. 이 무덤에 ‘6호’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였다. 가루베 지온이 공주에 온지 7년이 되던 해 여름, 그는 6호분의 배수구로부터 굴착하여 마침내 무덤의 방에까지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공주의 서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기록에 남겨진, 분명한 백제의 왕릉, 그것이었다.

백제문화의 연구라는 나름의 각오를 가지고 1927년 평양에서 공주로 옮겨온 가루베 지온에게 있어서 송산리 6호분의 발견은 7년만의 황홀한 결실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학문적으로 그가 ‘나쁜 사람’으로 찍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유적의 무단 발굴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범법 행위였다.

더욱이 조사 이후 그는 이 무덤이 이미 도굴된 것이라 하여 결과에 대한 공식적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부장 유물을 사취(私取)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끝까지 피할 수 없었고, 당시의 전문학자들로부터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클라이막스가 곧 전락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송산리로부터 수년 후, 그는 대전으로 전근하였고, 그리고 강경에서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그가 공주 재직시 수집하였던 유물들의 행방은 지금까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는 유물을 그대로 놓아둔 채 빈손으로 귀국하였다고 여러 차례 밝혔지만, 실물은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혹자는 실제 그가 유물을 깜쪽 같이 팔아넘긴 것이라고도 하고, 또는 6.25 전란 속에 소실, 증발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송산리의 추억’

그 가루베의 유물 몇 점이 지난 연말 공주에 돌아왔다. 그것은 대전 KBS 다큐 제작 과정에서 나라 박물관에서 확인된 백제 와당 몇 점으로, 큐슈박물관장의 주선으로 공주박물관에 기증된 것이라 한다. 그동안 가루베에 대한 비판은 많았지만, 정작 그의 조사활동의 내용을 파악하거나 유물에 대한 추적 작업은 소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해방 된지 60여 년, 가루베의 ‘비행’을 비판하는 데에는 핏대를 올렸어도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느만큼 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든다. ‘비행’을 비판하는 것으로 태만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송산리 6호분이 여전히 방치되어 있는 것도 그러한 태만의 예일 것이다.

송산리 6호분에서 중요한 것은 특히 벽화이다. 벽화는 최근 몇 십년동안 급격히 퇴색하고 손상되었지만, 이에 대한 분석 작업이나 연구와 보존 혹은 복원을 위한 노력은 아직 전혀 시도된 바가 없다. ‘6호분’이라는 명칭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도 우리의 무관심의 일단이다. 가루베가 대충 매겨놓은 번호를 진지한 논의 없이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을 중심으로 한 백제문화재의 세계문화유산 만들기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다. 좋은 영화는 주연만이 아니라 좋은 조연도 필요한 법이다. ‘6호분’, 송산리 벽화전축분이 훌륭한 조연자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과 배려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