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추억과 향기가 흠뻑 배어 있는 내 고향은 ‘용주산성 마루 잣골’이다. 큰 냇물과 작은 냇물을 건너 굽이굽이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삼태기 모양의 작은 촌락이 나온다.

나는 일상생활에 얽매어 세월가는 줄도 까맣게 모르고 지내다가 얼마 전에서야 고향을 찾았었다. 고향은 10여 가구의 작은 동네지만 예전에는 아이들과 청년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 활기차고 푸근했던 마을이었다.

나는 부푼 마음을 안고 동네를 한바퀴 돌다보니 멀리서 쟁기질하는 모습이 시골의 한적함을 더하여 주었다. 다행이 마당에서 일하던 고향의 이웃집 광호엄마가 큰 소리로 맞이하여 주었다.

“아이고! 오랜만에 식구들이 고향나들이 했네!”하며 반겨주었다. 그런데 열여섯 식구가 살던 우리집은 간데없고 오로지 벌통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쓸쓸하고 속상하였다. 그나마 다행이도 가마솥이 하나 눈에 띄었다.

우리집 많은 식구가 일년에 한두 번 닭 한 마리에 물 한 동이 붓고 국을 끓여 먹던 그 가마솥이 시커멓게 엎어져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이 앞서 손에 검댕이 묻는 줄도 모르고 어루만지고 있으니, 어린 시절의 풍경이 영화처럼 그려졌다. 그 때는 누구나 보리밥에 감자일 뿐, 일년 내내 쌀밥 한번 먹기 힘든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엄마 공책 사게 돈 줘”하면, 달걀 한 개를 주면서 “깨지지 않게 조심해서 동네 가게로 가지고 가서 사거라”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달걀이 깨질세라 꼭 쥐지도 못하고 두 손 모아 넘어질까 봐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5리 길을 걸어 2원짜리 누런 공책 한 권을 손에 들면 그제야 어깨에 가로질러 동여맨 책보를 풀어 이마에 흐른 땀을 훑곤 했었다.

나는 이런 저런 추억 속으로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철없는 어린 두 딸과 마누라는 또 다른 고향의 봄 향기에 취해 소리를 질렀다.“어머 이게 돈나물과 쑥 아니야! 양지 바른 곳이라 쑥이 많이 컸네”하며 호들갑이었다.

정말 그랬다. 그나마 어린 시절 추억이 사라질까봐 수많은 어린 새싹들이 가마솥을 빙빙 둘러 부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봄이 되면 온갖 초목에 물이 오르고 새싹을 트이기 위해 용트림을 치는 것이다. 사람들도 마찬가진가 보다. 아랫집 새댁도 뽀얀 얼굴에 활짝 웃음을 머금고 신랑과 함께 친정에 온 모양이다.

외양간에서 여물 먹는 것을 쳐다보면서 나는 추억에 잠기고 있었는데, 누렁이는 어지간히 급했던지 먹으며 싸며 쇠똥에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풍경이었다.

그렇다. 옛날 가난한 시절의 봄은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었다면, 지금의 저 평화로운 풍경은 봄이 무르익어 꽃이 만발함 그 자체이었다. 나는 문득, 혹여 나의 어리석음이 지금의 이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고 있었다.

어둡고 그늘진 곳에서 아직도 새싹조차 틔우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하물며 꽃을 피우게 하려면 더 많은 물과 거름을 나누어야 하는 것은 아닐 런지 되돌아보게 하였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흰 구름을 바라보노라니 지난해에 다녀 온 북녘하늘이 눈에 선하였다. 특히, 냇가에서 양동이에 물을 긷던 소녀의 애처로운 모습이 자꾸만 구름사이로 아련히 떠올랐다.

북녘 하늘에도 이제 길고 길었던 겨울옷을 벗어 던지고 희망과 활기를 가득 머금은 새싹을 틔워 꽃이 만발하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나는 풀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새 따갑던 해는 서쪽으로 기우는데 우리 예쁜 딸들은 나물 뜯을 생각은 하지 않고 산수유나무의 노란 꽃에만 입맞춤하고 있었다. 마냥 봄이 오는 소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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