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늘 백제이야기로 시작하여 무언가 이루어질듯 아스라한 애달픔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공주에서 백제가 아닌, 조선시대의 충신으로 나라사랑의 힘이 불끈불끈 솟구치는 충신이야기가 스민 지극히 한국적인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

현재 장기면 대교리(大橋里)라 불리는데 `한(大)+다리(橋)=한다리(大橋)` 큰 장군의 한쪽 다리가 있는 곳이라는, 현재 <국검자료>로 쓰이기도 하는 확실한 곳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육진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국방의 초석을 공고하게 다진 김종서 장군은 우리지역의 의당면 월곡리에서 출생했으며(현재 의당초등학교 뒷편), 호는 절재(節齊),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여진족의 침입이 많았던 북방을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적을 무찔렀던 용맹한 장군으로 문장도 뛰어나 고려사를 새로 쓰는 일에도 참여 하였으나, 세종 사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할 때 가장 먼저 제거당할 정도로 그는 강직하고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단종복위로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집을 새벽에 쳐들어가 도륙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장군의 말이 뛰어들어 잘려진 장군의 다리 한 편을 물고 이곳까지 달려와서는 쓰러져 죽고 말았다 한다.

대교리 밤실 장군의 묘소 전면에는 비석이 2기 건립되어 있는데, 원래의 비는 높이 94㎝의 호패형 비이다. 전면에는「조선좌의정절재김선생종서지묘」라고 2행으로 기록하고 있고, 또 다른 비는 1963년에 세워진 것으로「대광보국숭록대부좌의정익 충익호절재순천김공종서지묘」라 되어 있다.

이 묘소는 기념물 제 1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묘역의 입구에는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의 정려가 있는데「효자 통정대부 병조참의 김승규지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장군의 한 쪽 다리만 묻혔다고 하는 묘소와 함께 대교리 교각 옆엔 장군의 애마가 묻힌 말무덤도 있었으나 다리공사 할 때 무심히도 없어졌다.

이처럼 장기면의 한다리는 김종서 장군과 애마에서 연유하여 나온 지명으로 현재의 우리들에게 충의가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로 독립기념관이나 현충사에 버금가는 유명한 곳으로 알려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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