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 8

지난 7월 말경 필자는 아카이브 자료 공모전을 실시하여 여러 시민으로부터 공주의 옛 자료들을 수집하였는데, 그 안에서 김성룡이 간행한 『청암수집(淸菴壽集)』을 수집하였다. 『청암수집』은 공주 제2의 부호가인 김윤환(淸菴 金閏煥, 1870∼1936)의 회갑을 맞아 아들 김성룡이 간행한 회갑 문집으로 그의 호를 따서 지은 문집이다. 이 문집에는 전국 곳곳에서 그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온 글들이 빼곡히 수록되어 있으며, 모두가 그의 자선활동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우리 지역 공주는 일제의 강점 아래 충남의 도청소재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공주의 근대 역사에 여러 부호(富豪)의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 그중에 공주 부자 김윤환이 누구인지 아냐고 물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도, 공주 갑부 김갑순의 사돈으로 유명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때에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만큼 우리에게 김윤환이라는 인물은 항상 김갑순과 함께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김윤환은 사돈 김갑순과 조금은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번 이야기는 공주 제2의 갑부 김윤환에 대한 이야기다. 

김윤환, 그는 누구인가

61세의 청암 김윤환(출처 : 공주학연구원)
61세의 청암 김윤환(출처 : 공주학연구원)

김윤환은 통천김씨로 충남 보령군 남포면 신흥리 봉촌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선조들의 벼슬이 끊이지 않았던 집안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왔다. 그는 이른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0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소현세자의 묘인 소경원 참봉을 지냈다. 그 후에 중추원 의관을 거쳐 충남의 한산, 정산, 회덕과 경북의 의성, 만경 등 5개 지역의 군수를 지냈다. 그는 군수 재임 시절 늘 넓은 포용력으로 상급의 관인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좋은 평가는 속민들에게도 있었다. 1901년 정산군수에서 회덕군수로 체임되었을 때는 정산군민 홍승태를 비롯해 2천여 명이 공주부에 모여, 김윤환이 여러 폐단을 없애고 휼민하는 도리에 힘써 왔으니 다시 정산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군수로서 선정을 베풀었던 김윤환은 35세가 되는 1904년 왕실 재산관리를 맡아보던 내장원(內藏院)의 최고 관리직인 경(卿)으로 승차하였다. 비록 내장원의 최고 관리직을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체직되었으나 그는 소임을 다하였다. 이후 고향 남포로 돌아가 생활하던 그는, 거처를 충남도청이 있는 공주로 옮겨 본격적인 지역 사회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언제 공주로 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918년 5월 공주공립보통학교 동창생들이 여는 제2회 춘계대운동회에 고문으로서 김윤환이 찬조금을 내고 참석했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공주 주요 문제의 제일선에는 김윤환이 앞장서

공주에서 김윤환의 자선활동을 알린 것은 1918년 제민천교 준공이다. 욱정에서 대화정으로 통하는 제민천교는 시내 상류에 있는 중요한 다리로, 1년 전 홍수로 파괴되어 있었다. 당시 큰 홍수로 공주교를 비롯해 다리 2개도 함께 붕괴되었는데, 공주군에서는 1918년 공주교를 새롭게 중수하면서 전 공주교에 가설되었던 석재를 이용하여 제민천교를 중수하기로 하였다. 이때 공사비용 1천6백 원을 김윤환이 기부하였던 것이다.

이후 자선가로서 김윤환의 존재를 더욱 곤고히 한 일이 다름 아닌 공주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위해 1만4천5백 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한 일이다. 공주 사람들의 열망으로 어렵게 일궈낸 고등보통학교의 설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공주 유지들에게 내려진 할당금액 5천 원에서 솔선 자진하여 1만 원을 추가로 더 기부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공주청년수양회 회관 건축을 위해 2천 원을 추가로 기부하였다. 이에 청년수양회 임원과 유지 수십 명이 청년수양회의 악대를 이끌고 김윤환의 집으로 가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러고 나서 이틀 후에는 유지들이 당대에 매우 유명했던 매내옥(梅乃屋, 지금의 중동오뎅집 근처) 요릿집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공주고등여학교기성회 조직과 공주공립보통학교 증축기성회를 스스로 조직하고 회장직을 역임하며, 공주가 교육도시로 도약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김윤환의 행보에 매일신보에서는 ‘공주의 모든 문제에 선두자로 공주에 없지 못할 인물 김윤환’이라고 대서특필하였다. 즉, 공주가 충남의 도청소재지임에도 사회시설이 낙후된 한촌과도 같은 지역이나, 무슨 문제든지 떠들기 잘하기는 공주요, 문제의 제일선에 선두로 서 있기는 바로 김윤환이 있으니 무슨 문제든지 발생할 때에는 반드시 김윤환을 출격시키지 않으면 해결이 어려운 형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공주 안과 밖에서 김윤환이 솔선하는 자선 행보에 감탄하고 있었다.

공주시장에서 13개면 2만여 궁민에게 만주미를 지급해

그 이후에도 김윤환은 길에서 굶주림에 죽어가는 어린 고아들을 보며 공주구제원에 기부금을 희사하고, 공주소방조에 기계를 대신 구입해 주었다. 게다가 공주향교에도 기부금을 내 읍지와 청금록 등을 간행하고, 빈궁한 유림도 구제할 수 있었다. 또 공주공립보통학교 강당 건축비나 갑사 대웅전 중수, 공주 경찰서 무도장 개수 등 각종 건축비를 위한 기부금도 자주 희사하였다.

이처럼 공주의 지역발전을 위해 선도하고 자선활동을 한 김윤환은 1928년 11월 감수포장(紺綬褒章)을 받았다. 이 포장은 공익사업 공로자에게 주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지금도 수여하는 상이다. 당시 전국에서 9명이 선정되었는데, 이때 김윤환도 선정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1918년부터 1928년까지 10년 동안의 기부금을 조사하였는데, 총 기부금액이 7만6천30원이었다. 당시 30평짜리 도청 청사를 짓는데 3천 원 정도가 소요되었으니, 이 금액은 청사 건물 25개를 지을 수 있는 큰 금액이었다.
 
이 중 단 한번에 2만8천 원이라는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 일이 있었다. 그 때는 1927년 6월. 보릿고개가 길어지자 공주에는 곳곳에 많은 걸인들이 즐비하였다. 그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김윤환은 급히 2만 여 원의 대금으로 만주산 조(滿洲粟) 2천여 자루를 매입하여 사람마다 5되씩 제공하였다. 당시, 공주 면마다 지급하는 날짜를 정하여 할당량을 운송하여 분급하였다. 6월 1일부터 나흘 동안 진행되었는데, 첫날 1일은 장기면 800명, 2일 의당면은 100명, 3일 공주면에서는 1,750명, 주외면은 2,600명, 우성면 2,800명, 사곡면 2,700명, 정안면 1,700명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4일 지금의 유구읍인 신하면에는 2,900명, 지금의 청양군 목면에 해당하는 목동에는 800명, 탄천면에는 1,300명에 해당하는 양이 분급되었다.

『매일신보』에 기록된 ‘산성시장에서 만주조를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매일신보』에 기록된 ‘산성시장에서 만주조를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공주면에서는 산성동의 공주시장에서 나눠 줬다. 수십 리에서 온 남녀노소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시에 모인 공주시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빨리 나눠 준다고 하여도 4∼5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했는데, 협소한 시장에서 삼삼오오 지게를 의지하고 언제나 받을까 고대하는 모습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보고 욱정에 사는 박원서(朴元瑞)라는 사람은 깊이 감동하여, 자신은 하루 노동하고 벌고 아내는 콩나물 장사로 근근이 생활해 나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 45원을 순순히 내어 빈민들에게 점심을 제공하였다. 이에 감격한 공주사람들은 박원서의 특별한 선행을 기릴 불망비를 세우기로 했다 하니, 부호가 김윤환의 선행이 가난한 촌부에게, 그리고 다시 불망비를 세우려던 공주 사람들에게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한편, 그의 자선금은 1922년 경성에 설립한 한성신탁주식회사를 통해 마련되었던 듯하다. 이 회사는 일종의 금융대부업으로서 유가증권의 소유 대차나 중개 보증, 담보 대부 및 위탁관리를 등 일반신탁업무와 각종 부대사업을 하였다. 김윤환은 대주주로서 회사를 운영하였고 이때, 두 아들도 주식을 소유하고 있어 회사를 관리 운영하는데 매우 수월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 사돈인 김갑순이 공을 들인 대전의 유성온천을 1922년 주식회사로 상장하면서, 대주주 김갑순에 이어 김윤환도 함께 주주로서 참여하여 자금을 더욱 늘릴 수 있었다. 이처럼 상당한 자금력이 있었기에 기부금을 내겠다고 결심을 하면 쉽게 기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산성공원 회갑연에 공주 사람 다 모여

김윤환은 그의 61세 회갑도 ‘충남의 백만장자’ 그리고 ‘독행가’ 답게 치렀다. 1930년 3월 21일 그는 환갑을 맞아 친족과 지인, 그 밖의 사람들까지 약 1,500명에게 환갑을 자축하는 잔치를 개최한다고 초대장을 보냈다. 그래서 21일은 자택에서 연회를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음 날에는 산성공원에서 공주 일반인을 초대하여 잔치를 열기까지 하였다. 사람들은 이 또한 공주 사람을 위한 진휼(賑恤)로 여기며 많은 사람이 칭찬하였다.  

이때 김윤환의 아들 김성룡은 아버지의 회갑을 기념하며  『청암수집』을 간행하였다. 김성룡은 공주와 김윤환의 고향 보령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유림과 당대 고명 인사들에게 김윤환의 회갑을 위해 축문을 받았다. 그때 받은 글로 총 3권 2책의 수집(壽集)이 완성되었다. 총 1,135명에게 축문을 받았는데, 이 수집에는 28명에게 받은 문(文), 99명의 인사로부터 받은 명(銘), 67명의 전·현직 고관대작에게 받은 서(書), 941명으로부터 받은 시(詩)가 수록되어 있다.

1931년 아들 김성룡이 간행한 『청암수집』(출처:공주학연구원)
1931년 아들 김성룡이 간행한 『청암수집』(출처:공주학연구원)

여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공주영명학교의 미국인 선교사 우리암 교장의 글도 있다. 우리암은 김윤환을 두고 “은혜로서 사람을 사랑하고, 거액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학문을 중요하게 여기니 세상 사람들이 선생을 자공(子貢)이라 부른다”고 칭찬하였다. 여기서 자공은 김윤환이 경성 지성전에 공자 금상(金像)을 만들고 향사할 수 있도록 1만원의 기부금을 내자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지금 세상의 자공이다(今世子貢)’라고 직접 글귀를 지어 준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

공주 근대사 현장에 김윤환이 있었다

이와 같이 김윤환은 그의 거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많은 기부활동을 하였고, 그런 모습에 공주 사람들은 이미 1926년 그를 포장하기 위하여 불망비를 세우고자 희사금을 각출하여 2백여 원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 불망비가 비록 지금은 현존하지 않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김윤환의 자선활동은 불망비를 세울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김윤환의 이러한 자선 행적을 바탕으로 이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단적으로 내리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여러 자선활동 이외에도 충남권농조합을 조직해 소작쟁의를 완화하려 노력하였으나 소작인들과 분쟁들이 이어졌고, 모친 묘소 관련 뇌물 수수 등 크고 작은 일들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어쩌면 일제강점기 외지 출신으로서 공주 유지로 성장하기 위해 자선에 집중하였을 수도 있고, 부호로서 그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권력층의 편에 서는 시대적 한계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주 근대사의 굵직한 역사 현장에 자선, 기부 등과 함께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회자하고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작성자: 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고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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