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이복(李福)은 公州 李氏일 가능성 커, 명재 윤증의 外家는 公州(公山) 李氏

우리조상 뿌리찾기 학술세미나 ‘公州(公山)이씨와 명탄서원’ 학술세미나가 9월 19일(토) 오후 1시 공주문화원 강당에서 공주유림(향교, 유도회), 공산이씨 문중 후손, 출향인 등을 대상으로 개최됐다.

이 날 세미나에는 나태주 공주문화원장, 김태룡 공주시의회 의장, 이형복 공주시 발전기획단장을 비롯해 公州(公山) 李氏 문중과 대종회 이병운(李炳雲) 회장 등 200 여명이 참석했다.

공주의 조상 뿌리 찾기 사업은 공주를 탯줄로 하는 저명성씨들의 고향 바로알기와 전통 찾기 사업으로 공주시가 역점을 두어 공주문화원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다.

공주문화원은 이 사업을 통해 공주시의 유적과 계파 유적을 중심으로 유적, 인물 자료를 재조명하며, 학술세미나 개최 외에 책자발간, 유적답사와 공주시 5도2촌 프로그램과 연계한 고향찾기, 자료전시회, 사이버시민홍보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날 우리조상뿌리찾기 사업 첫 번째 학술세미나 제1주제 발표는 임선빈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이명성, 이명덕의 행적과 公州(公山) 李氏’, 제2주제는 이해준 공주대 교수가 ‘명탄서원의 역사와 변천’, 제3주제는 홍제연(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공주의 公州(公山) 李氏 유적’을 각각 발표했다.

이날 학술세미나에서는 효자 이복(李福)이 公州 李氏일 가능성 크다는 것과 명재 윤증의 外家가 公州(公山) 李氏라는 점등이 발표돼 공주와 관련 인물과 문중들이 公州(公山) 李氏와의 관계를 나타내 관심을 끌었다.

이날 학술발표회가 끝난 후 문중과 관계자들은 公州(公山)이씨 제향인물인 ‘이명성, 이명덕’을 모신 충절사와 명탄서원을 답사, 公州(公山) 李氏의 행적을 살폈다.

한편 공주시와 공주문화원에서는 ‘2009년 공주의 4(四)성씨 사업’ 중 나머지 3 성씨인 경주 이씨(10월 25일), 남평 문씨(11월 17일), 진주 유씨(11월 중) 학술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관련유적

명탄서원(鳴灘書院, 忠節祠)

○ 소재지 : 공주시 월송동(月松洞, 四松亭) 210번지
○ 창건연대 : 1851년(철종 2)
○ 문화재지정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0호

1. 연혁

명탄서원은 송은(松隱) 이명성(李明誠)과 사봉(沙峰) 이명덕(李明德)의 학행을 기르기 위하여 1490년(성종 21)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이나 ‘열읍원우사적’(1759, 1763)과 같은 사서에 기록이 없고 1858년 도에 간행된 ‘공산지’에 처음 기록이 찾아지는 것으로 보아 명탄서원의 건립 연대는 다시한번 확인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위치는 명탄(鳴灘, ‘울뫼’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금강의 상류인 현재의 연기군 금남면 영대리 지역)이었다.

1967년 간행된 ‘명탄서원지’는 건립된 1490년 당시에 명탄서원이라 사액되었다고는 적고 있으나, 우리나라 서원제도의 발달사를 참고하여 본다면 사액이 이 시기에 이루어질 수는 없었으므로 당시의 건립은 사묘(祠廟), 혹은 부조묘의 형태였다고 생각된다.(鳴灘書院誌, 1967).

당시의 충절사(忠節祠)가 서원으로 발전되는 것은 조선후기의 일로 ‘명탄서원지’에 의하면 1851년에 나라의 허락을 받아 이건·복설되고 1854년에 다시 사액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공산지’(1858)나 ‘호서읍지’(1871)가 충절사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근거는 불명하다.

그 후 2백여 년이 지난 1851년에 이르러 이정구의 후손인 태종백(太宗伯) 이학수(李鶴秀)와 조상서의 후손인 조재응(趙在膺)과 죽산(竹山) 안광직(安光直, 1775~?)이 조정에 서원의 중건을 건의하고 여기에 공주와 노성의 유림들의 발의가 더하여져 산림의 허가와 판관(判官) 안제수(安齊壽), 관찰사 홍열모(洪說模)의 승인 및 예조의 허가를 얻어 1851년(철종 2)에 송탄(訟灘)의 송정(松亭) 즉 현재의 공주시 월송동으로 이건하여 복설하였다. 그러나 명탄서원도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중건 된지 17년 만인 1871년 9고종 8)에 훼철되었다.

지금의 서원은 1955년 한구택(韓龜澤), 서정주(徐廷柱), 오락교(吳樂敎) 등 공주향교 유림들이 전국의 향교와 유림들에게 통문을 돌리고 그 후 이명성의 후손인 이찬(李燦) 등과 이명성의 후손인 이태희(李泰熙) 등이 각도를 순회하여 찬동하는 인사나 후손에게서 재물을 모아서 이듬해인 1956년에 현재의 사우와 삼문을 재건하고 1957년에 가건물로 강당을 건립하였으며 1959년에 양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게 되었다.

명탄서원은 1984년 충남 문화재자료 제70호로 지정되어 보호·관리 되어 오고 있다. 1998년에 이명성의 18세손인 종인(種仁)이 충청남도와 공주시, 그리고 공주향교 등 여러 유림과 후손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강당을 중건하였다.

충절사(忠節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 익공양식으로 삼문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삼문의 전면 우측에는 1985년에 건립된 김희진이 짓고, 조득상이 써서 건립한 묘정비(묘정비)와 강당 및 고직사가 우측에 붙어 있고,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2. 제향인물의 행적

이명성(李明誠, ?~?)은 공주(공산) 이 씨로 자는 경장(敬章), 호는 송은(松隱)이다. 전공판서 충정공 엽(曄)의 둘째 아들이자 첨의정승 사손(思孫)의 손자로 고려 말에 적성감무(積城監務)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올랐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인이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교류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탄식하기를 ‘나라가 망함에 있어 이를 구하지 못하면 충이 아니요, 어버이가 늙었는데 이를 부양하지 못하면 효가 아니다.  그러나 고국의 의리는 중하고 노모의 은혜는 가볍다.’고 하고 벼슬을 버린 후 동생 명덕에게 어머니를 맡긴 후 정몽주와 만월대에 가서 이별을 하고 강원도 이천(伊川)의 산중에 은거 하였다.

그는 조선이 개국되자 조선조에서 벼슬하지 말고 초목과 벗 삼아 고려를 향한 마음을 지키라는 뜻으로 모든 아들의 이름에 ‘초(艸)’변을 붙여 ‘근(筋)’, ‘분(芬)’, ‘말(茉)’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또한 자신도 조선조에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절개를 나타냈다고 한다.

‘아침에 부조현에서 이별한
제현들 어데로 갔나
붉은 충성심은 별빛처럼 또렷하고
마음속에 맺힌 원한 실처럼 맺혔다.
밤빛은 돌아가는 구름처럼 축축하고
깜박이는 등불 밑에 나그네 꿈만 어수선하네
충신열사를 말하지 말라
대의(大義)는 죽고 삶을 기하여 나오느니.

이명성은 여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으며 조선 초 성종 대에 사림의 발의로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 한명의 제향인물인 이명덕은 그의 동생이다. 이명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시기의 공주지역 각종 읍지류에 가장 먼저 기록되는 인물이다.

이명덕(李明德, 1373~1444)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송산이며 엽(曄)의 아들이다. 자는 신지(新之), 호연(浩然), 호는 사봉(沙峰)으로 형과 마찬가지로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1392년(태조 5)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에 보직되었으며 사헌부 감찰, 사간원 우헌납, 장령, 사인, 집의, 좌사간대부, 형조참의 겸 지도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15년(태종 12) 승정원 동부대언이 되고 좌부대언에 승진하였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이씨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 성씨조에 제일 먼저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큰 성씨이다. 공주지역의 큰 토성으로 이씨 중에서도 공주(공산)이씨를 들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명덕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백의로 종군하여 대승한 이천장(李天章)이나, 역시 임진왜란 때 부산의 위급함을 알고 출전하여 순절하여 부산 충절사에 제향 된 이연헌(李延憲) 등의 기록이나 향교에 등재되어 있는 공주(공산) 이 씨들의 수, 그리고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에 기록되어 있는 공산 이 씨들에 대한 기록으로 미루어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앞 뒤 시기인 17세기 중반에 공산 이 씨들은 이 지역에서 커다란 세력이었으며 19세기에 이르러 1851년 명탄서원의 중건으로 다시 활동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효자 이복(李福)은 공주 이씨일 가능성 커

공주의 대표적인 효자로는 고려 때 이복(李福)과 신라 때 향덕(鄕德)을 들 수 있다. 이 중 이복이 公州(公山) 李氏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끌었다.

이는 임선빈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이명성, 이명덕의 행적과 公州(公山) 李氏’ 주제로 발표한 논문에서 “공주(공산)이씨는 조선초기 세종실록지리지 공주목 토성조에 올라있는 성씨이다.

세지의 토성은 고려 초기부터 전해 오는 성씨관계 자료인 ‘古籍’과 지리지의 편찬을 위한 작업으로 각도에서 보고한 성씨관계 기록을 담은 문서였던 ‘關’에 다 같이 기재되어 있던 성씨를 지칭한다.

공주(공산)이씨는 공주목의 읍사기구를 운영하는 향리세계에서 상층부를 독점했을 것이다. 고려시대 공주의 향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동국여지승람 공주목 효자조에 고려시대의 효자로 이복(李福)이 수록되어 있는데, 공주의 아전[州吏]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이복은 바로 공주(공산)이씨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공산이씨 관련유적

◎ 공주향교(公州鄕校)

조선초기의 향교는 현재의 교동이 아닌 웅진동 송산리에 있었다. 이는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향교가 “주의 서북쪽 3리에 있고 서쪽에 옛 왕릉이 있다(在州西北三里 西有古陵墓)”라 한 것에서 알 수가 있다.

그 후 공주향교가 불의의 화재를 만나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1622년(인조 원년)이었다.

그 같은 사실은 1859년 발간된 ‘公山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데 공산지에 의하면 현재의 위치로 향교가 이건 될 때 공산이씨 이정란(李廷蘭)과 그의 종제(從弟) 대현(大賢)이 각기 14세와 10세의 어린 나이로 현재 향교위치의 토지를 헌납함에 따라 화재로 소실된 향교가 중건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구전에 의하면 이들이 모친이 헌납하였다고도 한다.

공주의 주요 성씨와 공주이씨의 인연

1. 우성면 귀산리 검바위 만경노씨

만경노씨의 공주 입향은 공주이씨의 사위의 인연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만경노씨의 시조 盧克淸의 7세손인 盧革이 처음으로 공주에 거주하게 되었다.

노혁은 1401년(태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부정, 동부승지를 거쳐 1434년(세종 16)에는 홍주목사와 홍주병마첨절제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공주의 토성인 공주이씨 가문의 叛軍器監 李安義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 미루어 처가 쪽과의 인연으로 공주에 정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귀산리 삼의사는 만경노씨 노응환·노응탁·노응호 3형제의 생가 터이다. 노응환(1555~1592), 노응탁(盧應晫, 1560~1592), 노응호(盧應皓, 1574~1592) 3형제는 노세득(盧世得, 1526~1589)의 아들로서 일찍이 공주목사였던 중봉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공부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이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우게 되었는데 이때 아들 삼형제도 조헌의 의병에 합류하였다. 노응환, 노응탁은 청주전투와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가 금산에서 순절하였다.

2. 의당면 태산리 전주이씨 덕천군파

의당면 태산리 일대에는 전주이씨 덕천군파의 집성촌으로 이곳에 덕천군의 사우가 있다.

원래 덕천군 사우는 남한산성 서문 밖인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거여리에 있었으나 이 지역이 군용지로 편입되면서 후손이 다수 거주하는 공주 의당으로 이전한 것이다.

공주에서 세거하는 덕천군파가 처음 공주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진주목사 이몽경(李夢慶, 1538~1624)때 부터였다.

원래는 양주(楊州)지역에 세거하였으나 인진왜란 때에 전란을 피해 낙향하였다고 한다. 왜 하필이면 공주로 왔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사우가 위치한 공주 의랑(儀郞)은 이몽경의 외향(外鄕)으로 추정된다.

이몽경의 어머니가 공주이씨 병사 이예(李藝)의 딸이라는 사실과 원래 이곳의 지명이 신대(新垈)로 공주 이씨들의 세거지였다는 점이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전주 이씨들의 입향 후 마을 이름은 ‘사우말’로 바뀌었고, 원 거주자였던 공주 이씨들도 대부분 떠나고 공주 이씨들의 고총만 남아 있다.

3. 우성면 내산리 부전동 예안이씨

공주에서 예산(청양) 방면 도로를 따라 연미산을 끼고 돌아 북쪽으로 향하면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 넓은 들이 보인다. 이 일대를 ‘부전동’이라 하는데 행정구역상으로 우성면(宇城面)의 한천리(韓川里)·내산리(內山里)·도천리(道川里)·신웅리(新雄里)의 4개 리, 15개의 자연촌락이다.

이곳에는 여러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데 조선 초기 예안김씨(禮安金氏)가 들어온 이래, 예안김씨의 외손이었던 이세장(李世章; 1497~1562,본관 전주)이 16세기에 들어왔고, 다음으로 강화최씨(江華崔氏)가 예안김씨 김견(金堅)의 사위로 이 고을에 들어왔다.

그 다음에 충주지씨(忠州池氏)가 예안김씨의 외손서로 처향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외에도 조선전기에 부전동에는 보성오씨(寶城吳氏)·하양허씨(河陽許氏)·한양조씨(漢陽趙氏) 등의 성씨가 세거하였다.

박스기사 - 공주(공산)이씨 이병운 대종회장 인터뷰

“공주의 토성인 공주 이씨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오늘 이같은 학술세미나 자리를 마련해 주신 공주시와 공주문화원에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공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

우리조상 뿌리찾기 사업 첫 번째 사업인 ‘공주(공산)이씨와 명탄서원’ 학술세미나에 참석한 이병운 대종회장은 먼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 회장은 이어 “이 사업이 더욱 발전하여 공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5도2촌과 연계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각지에 흩어진 문중을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 공주 이씨 문중에는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지낸 이형근 장군을 비롯해 3·1만세운동 33인의 하나인 이필주 목사, 이종우 전 문교부장관 등을 들 수 있고 특히 우리나라 최초 우주인 이소연씨도 공주 이씨다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