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홍순 (일어 일문학 전공·제일 일어전문학원)

야마구치시는 인구 14만 명, 공무원 수 983명, 학생 수 1만7334명, 온천 휴양지로서 자연 배경이 수려하고 정치, 교육의 도시이며, 위성통신 기지를 갖춘 고도의 정보통신 도시이다. 자매결연 조인식 당시의 현황이다.

백제 제 26대 성왕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는 서기 611년 일본에 건너가 야마구치(山口) 일대에 강력한 왕국을 세웠다. 성왕은 ‘日本書紀’에는 성명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명왕은 무령왕의 아들로 영특하여 일을 올바르게 잘 처리했으며 무령왕이 숨지자 왕위를 이어받았으며 국민들은 그를 성명왕이라고 불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왕은 백제 중흥의 영군이며 도읍을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하고 선왕인 무령왕의 뜻을 이어받아 중국 양(梁)나라와 교역, 새로운 문물을 들여와 문화를 한층 더 드높였다.

또 왜(倭)와는 우호 관계를 유지 538년 불교를 전하고, 오경박사와 많은 기술자를 보내 일본 문화의 기틀을 세우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 무렵 임성태자가 일본에 건너간 것이다. 당시 일본은 통일국가였지만 정권은 백제인의 손에 있었다.

임성태자 일행이 일본 땅에 닿은 것은 제 33대 스이코 천왕 19년 지금의 야마구치현(山口 県) 호후시(防府市) 바닷가 다다라(多多良) 해변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곳에서 조금 내려가면 히라오만(平生湾)이 있는데 이 해안에는 지금도 百済部神社가 있고 마을에도 百済部가 있으며 여러 기의 고분도 있다.

백제부가 있는 히라오만에는 ‘韓의 浦’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다. 히라오만은 백제 무역의 거점이었으며, 구마게군(熊毛郡) 히라오정(平生町)엔 보경사란 절이 있는데, 이 절 안에 봉안된 천수관음황금불은 임성태자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것을 보면 임성태자는 불상 조각을 잘 했으며, 성왕의 둘째 아들 아좌태자도 일본에서 많은 활동을 했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일본 국보인 성덕태자를 그렸다.

임성태자도 성덕태자와는 친교를 가지면서 백제 문화를 기본으로 하여 일본 건국에 기여 야마토(大和) 조정의 기초를 닦았다. 백제 성왕의 둘째 아좌태자와 셋째 임성태자는 그림과 불상, 조각 등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임성태자 일행이 긴 항해 끝에 ‘다다랐다’는 우리말 발음 다다라(多多良)에서 2년 동안 머물렀으며 이곳을 떠나 지금의 야마구치현 오오우치정(大內町)에 이주하여, 그때부터 이 지명을 따서 성씨를 오오우치(大內)씨로 바꾸고 제 16대 성방(盛房) 때엔 이 고을 주변의 광대한 지역 통치자로 지명되었다.

이 고장의 이름은 주방국(周防国)으로 군권까지 갖고 있는 지방 장관이 되었으며 봉건제후국의 영주로써 자자손손 세습하는 자리였다.

이 모든 일이 사실로 인정되어 山口市의 요청으로 공주시와 1993년 2월 23일 자매결연을 맺어 양 도시는 많은 문화 교류를 하고 있으며, 특히 백제문화제 때에는 임성태자의 후손인 오오우치(大內)씨들이 백여 명 이상 공주를 찾아 1400년 전 임성태자의 모습으로 가장행렬에 동참하고 있으며 자매 도시인 공주와는 형제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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