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백제 때부터 참 여러 번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곳이었다.

 

   
▷ 홍정희 (공주시 문화관광해설사회장)    

공주는 백제 때부터 참 여러 번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곳이었다.

백제가 한성에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어렵사리 피신해 온 곳도 공주이고 사비성 전투에서 백제의 마지막 왕이 몸을 의탁한 곳도 공주였다.

공주는 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이면서,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절경인 것은 공주인들도 잘 알고 있다.

백제의 웅진성이던 공산성은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까지 몽진을 간 고려현종 뿐만이 아니라, 1624년 2월 8일 그 유명한 조선시대 이괄의 난 때 인조임금의 피난처였고, 그것으로 인한 흔적이 무척이나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정안면 석송리 큰 도로변 숲속 바위에 새겨진 ‘석송동천’이란 글자가 증거이다.

인조임금이 탄 가마가 이곳을 지날 때 지방 유림들이 인조왕께 이 지방 백성의 어려움을 애타하니, 그 자리에서 세금을 감면해 주도록 어명을 내리고, ‘석송동천’이란 친필을 하사해 오늘날까지 바위에 새겨져 전해오고 있는데, 그와 더불어 ‘소물(牛井)’, ‘인절미’, ‘조왕동(助王洞)’ 등의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牛井은 인조왕 일행이 그곳을 지날 때 지친 군마가 쉬면서 물을 마신 곳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우성면 목천리에 아직 그 자취가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다.

그리고 조왕동은 인조왕이 탄 가마가 동네사람 노숙의 집에서 하루 밤을 지냈는데 군량미를 바쳐 임금을 도왔다하여 ‘조왕동’이라 불려지고 있다.

인조는 공산성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도운 공주백성들을 위하여 특별과거를 시행했는데 이때 급제한 사람이 홍익한이었다.

현재 ‘석송동천(石松洞天)’이라고 새긴 바위주변에 정자가 있는데 석송정이다. 원래 있던 정자는 많이 허물어져 1985년 공주시가 다시 세웠는데 무수한 풀들이 자라서 석송동천이란 글씨를 가리고, 정자도 가로수에 가리어져 있어 특별히 알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바위 바로 옆으로 큰 도로가 나고, 차들이 끊임없이 질주하여 아까운 유물이 훼손될까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적잖이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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