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未始有封         道는 無限하고
言未始有常         言語는 有限하다
爲是而有畛也       有限한 것으로 無限한 것을 알수 없다.

 

言語가 限界가 있다 라고 하는것은 事物의 穩全함을 언어로 나타내려고 하지만 事物의 본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할수 없기 때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의 錯誤, 眞實의 誤導를 가져올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不合理性,不的確性,不正鵠性을 隨伴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의 비유법, 반어법, 역설법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언어는 진실을 표현하는것에 많은 한계를 지닌 근원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어뿐만이 아니고 事物의 本體자체도 불확실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냇물이 흐르지만 그 물이 두 번 흐를수 없고 하나의 생각을 두 번 하지만 한번했던 생각이 똑같은 생각일수는 없다. 그때의 狀況이 흐르면 생각도 흐르기 때문이다.

韓國禪宗의 脈인 田岡禪師에 平生의 話頭인 板齒生毛(이빨에 털이 났다)를 보자.
그야말로 荒唐無稽한 말이 아닌가.
禪門염頌의 鐵樹開花(쇠나무에 꽃이 피다)를 보자.

荒唐한 말을 하는 이유는 사물의 본체가 황당하기 때문이다. 어제 여기에 있던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 없고 한줌의 재가 되어 내앞에 있다면 이것또한 얼마나 이해할수 없는 황당한 상황이겠는가! 세상을 이해하는데는 이러한데서 출발한다.

클론의 강원래가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의 상태에서 此生에서는 결코 두발로 땅을 밟을수 없다.

그러나 魂의 脈芽(사물의 근원적 뿌리)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살아있는 나뭇가지를 꺽어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는일은 가능한 일이다. 반면 에 꺽어진 나뭇가지를 붙여서 다시 생명력이 돌아오게 하는일. 또한 가능해야 한다. 왜냐하면 道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거나 有限하다면 道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살이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은 넓고 마음은 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有限한 마음으로 無限한 世上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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