莊子  外篇  <秋水>

莊子與惠子遊於濠梁之上 (장자여혜자유어호량지상)
請循其本  子曰汝安知魚樂云者 (청순기본 자왈여안지어락운자)
旣已知吾知之而問我 我知之濠上也 (기이지오지지이문아 아지지호상야)

 

장자가 혜자와 더불어 호수가에 있는 물고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물고기의 줄거움을 알고 있다.”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줄거움을 아는가?”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줄거움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나는 물고기의 줄거움을 알고 있다. 물고기의 줄거움은 우리가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벗어나 있네.”

언어(말과 글)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소통이나 교류를 원활하게 하여주지만 사람과 事物(사물)과의 만남에 있어서는 事物과의 얇은 껍질(coating.코팅)이 형성되어 사물과 나의 交通(교통)을 방해한다.

나는 울릉도 여행을 한적이 있다. 울릉도 옆의 작은 섬 竹島(죽도)에서 깍아지른 절벽너머 수백년의 동백나무와 수천년을 파도와 부딪친 암벽과 저 먼 푸른바다 그리고 지평선 너머의 雲霧(운무), 蜃氣樓(신기루)를 바라보며 언어는 무용(無用)한 것이고 애초에 언어와 문자가 없는 것이 太初의 근원적인 세계에 符合(부합. 합치)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언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불합리한 쓰레기임을 알았다.

동물이 위기대처능력이 뛰어난 것은 언어가 사물과의 직관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방끈이 짧다고 하는 무학(無學)인 사람들이 사람들간의 소통이나 이해, 교양이나 지적인 면에서는 뒤질지 모르나 사물을 바라보는 直觀(직접 사물을 정확하게 보는 눈)은 뛰어나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정신의 불합리한 쓰레기가 없어 사물과 정신과의 얇은껍질(coating.코팅)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과 사물을 보다 정확하게 바라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老子는 損之又損 知止又止(손지우손 지지우지)라고 했다. 알고 있는 것을 덜어내고 없애고 버리는 것이 道와 事物(사물)에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禪詩(선시) 한편을 보자.

雁過影水 雁無影心 水無沈影 (안과영수 안무영심 수무침영)

기러기 호수 위를 날다. 기러기 호수 위에 그림자 남길 생각 없고 호수 또한 추호도 그림자 담을 생각 있었겠는가! 
이것이 자연의 언어이며 직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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