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진

介者移畵 外非譽也  胥靡登高而不懼  遺死生也
개자이화 외비예야 서미등고이불구 유사생야

夫復謵不餽  而忘人  忘人因以爲天人矣        
부복습불궤 이망인 망인인이위천인의

형벌(刑罰)로 한쪽다리가 잘린 사람이 형벌에 구애되지 않는 것은  세상의 비난이나 칭찬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고 사형수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죽음이나 삶에 차별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남과 친히 지내면서 선물 따위를 하지 않으면서 가식이나 僞善(위선)을 멀리하는 것은 남과 자기의 구별(차별)을 잊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남과 자기의 차별, 말과 실천의 차별, 몸과 마음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 삶과 죽음을 둘로 보는 것은 하늘과 하나가 된 사람이 아니다.

실천하기 전에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龐居士語錄에는 방거사의 임종장면이 나오는데,  방거사가 딸에게 묻는다.
이제 나는 이 생을 마감하려고 한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딸 靈照(영조)는 “아버님! 이것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하고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 대신 딸 영조는 죽음을 실제로 보여 주었다. <居士將入滅 謂靈照曰 視日早晩及午以報 照遽報 日已中矣 而有蝕也 士出戶觀次 照卽登父座 合掌坐忘>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듯이 삶과 죽음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식과 위선으로서 상대방에게 사기를 치는 근원은 삶과 죽음을, 상대방과 자기를, 몸과 마음이 둘이라고 여기는 데에 있다.  이를테면 삶은 정직한데 죽음이 사기를 친다거나 마음은 정직한데 몸이 거짓말을 한다는 식(式)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은 정직한데 몸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둘이라는 얘기인데 이것은 金(금)으로 금을 도금(덧칠)한다는 것이고 물로서 물기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그렇게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나누어져 분리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혹여 삶과 죽음사이에 털끝만치의 間隙(간극, 틈)이 있다면 이것은 生死에 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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