莫然有間  而子桑戶死  或編曲  或鼓琴  相和而歌曰 
막연유간  이자상호사  혹편곡  혹고금  상화이가왈

而已反其眞  而我猶爲人猗    子貢問   臨尸而歌禮乎
이이반기진  이아유위인의   자공문   임시이가예호

二人相視而笑曰   是惡知禮意
이인상시이소왈   시오지예의

어느 날 子桑戶가 죽었다.
子貢이 弔問하러 갔더니 자상호 친구인 맹자반과 자금장 두 사람은 시체 앞에서 거문고를 뜯고 노래를 부르며 말하기를  “자상호,  당신은 본래의 眞實로 들어갔는데 우리는 아직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구나” 하였다.

子貢이 물었다.
“주검(시체)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禮입니까?”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어찌 禮의 뜻을 알겠는가?”

佛家에서 말하는 前生과 來生은 抽象的인 敎理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제의 기억이 사라진 것이 前生이요, 생각나지 않는 오늘이 來生이다. 죽음은 어제의 기억이 사라진 것이요,  또한 생각나지 않는 내일이다.

나는 생각한다. 죽음은 運命보다 강하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運命이라면 죽음은 어제가 사라지고 내일도 사라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巫俗信仰의 理論들이 샤마니즘(Shamanism)으로 通稱되는 것은 運命이나 죽음에 대한 無知이다. 산사람의 魂을 慰撫한다거나 죽은 사람의 魂을 薦度한다고 하는 것이 虛妄한 굿거리에 불과하다고 볼지 모르지만 이것은 運命과 죽음에 대한 洞察作法이다.

 碧巖錄에 雪峰義存은 말한다.

從門入者 不是家珍 (운명이라고 말하는 者,  보물을 만질 수 없다)

山靈祐는 말한다.

我若說似汝  汝已後罵我去  我說底是我抵   終不干汝事
(내가 운명을 말한다면 그대는 나를 욕할 것이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운명에 대하여 말을 한다고 하여도 그대와는 무관(無關)한 일이다.)

畢竟 전생과 내생은 이론이나 논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발견인 自覺에 있다는 것이 옳다 죽음이 運命보다 강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발견인 自覺의 전단계가 운명이며 죽음은 自覺과 운명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사라진다는 것은 不可量 不可測 의 眞諦의 顯現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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